사진 전문 서점 '피사체'에서의 행복
월요일이었다. 나처럼 사진을 사랑하는 J가 말했다.
창신동에 '피사체'란 사진 전문 책방이 생겼으니 시간 날 때 한번 방문해 보라는 이야기였다. 사진 전문 서점이 또 생겼다니.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진을 왜 사랑하게 된 걸까?' 정확하게 말할 순 없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특별한 이유가 없듯 사진도 내게는 그랬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문밖으로 나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보문동에 용무가 있던 날이었다. 전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곳을 일정에 추가했다. J가 알려준 사진 전문 서점 '피사체'였다. 동묘앞역에 내려 두 발을 바쁘게 디뎠다. 강한 햇빛을 맞으며 수족관 거리로 향했다. 거리 한편에 자리한 서점의 모습이 보였다. 영문으로 피사체라고 쓰여있던 빨간색 폰트. 지도 앱에서 봤던 그 모습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젊은 여직원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게 맞아주는 모습에 애써 여유 있는 미소로 답했다. 옆으로 하얀 칸막이가 있었는데 사진집이 진열된 공간은 칸막이를 건너가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엔 젊은 남자 세 명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때였다. 무리 중 한 젊은 남자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도 밝은 인사였다. '아... 한 명은 직원이었구나.' 나도 밝은 미소로 답했다. 이곳은 밝음이 기본값인 걸로 보였다. 첫 방문인데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후카세 마사히사'의 사진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나는 사진작가들을 잘 모른다. 그래도 후카세 마사히사의 이름은 들어 봤었다. 딱 그 정도였다. 예전에 커머셜 스튜디오에 다닐 땐 매거진만 보며 사진을 연습했었다. 순수 사진작가들의 작품까지 챙겨 보기엔 스튜디오 업무가 끝난 후 홀로 남아 라이팅 연습을 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지나고 보니 핑계였다. 만약에 사진을 전공했더라면 조금은 달랐을까 싶지만 어쨌든 편식 가득한 사랑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진집을 들고 감상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 그 무리의 이야기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라 거의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수준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사진에 무척 진심인 걸로 보이는 듯한 말들이 오갔다. 딱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 내게 인사를 건네었던 젊은 남자는 '피사체'의 사장님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손님이라는 것.
그때였다. 마사히사 작가의 사진들이 좋지 않느냐며 사장님이 말을 걸어왔다. 정말 좋다고 답을 했더니 바로 옆에 있던 사진집을 한 권 건넸다. 'Ravens'라는 사진집이었고 큰 마음을 먹고 특별히 오픈을 하게 됐다며 함께 감상하면 좋을 것이라는 말로 정중히 권했다. 그런 후 그는 옆에 있던 손님과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Ravens'에 실려있는 사진은 충격이었다. '아... 작가라면 사진만으로도 말할 수 있어야 하는구나.' 내가 찍은 사진이 초라해졌다. 살면서 가장 의미 없는 게 비교인 것을 알지만 본능적으로 그런 감정이 밀려왔다. (나중에야 깨닫게 된 거지만 당시 느꼈던 감정은 초라함이 아닌 작가를 향한 존경이었다) 사장님이 다시 내게 다가왔고 'Ravens'에 실린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다른 사진들을 둘러봤다. 다른 서점에서도 괜찮게 봤었던 카와시마 코토리의 사진집이었다. 사장님은 여전히 아까 그 두 명의 손님과 이야기 중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귓가를 서성거렸다. 이야기는 사진과 삶에 대한 이야기였고 가치관 또는 철학에 관한 말들이었다. 서점 안을 채우던 소리가 멈추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끼어들어 고요했던 순간을 깨웠다. "마치 독서 모임에 온 거 같아요. 사진집 독서 모임이요." 말을 마친 후 나는 멋쩍게 웃었다. "아! 그런가요. 하하." 무리 중 한 명이 화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손님 중 한 명이 아내에게 선물하겠다며 코토리의 사진집을 손에 쥐었다. 그건 서점 안에 오픈되어 있지 않던 책이었다. 그러자 사장님은 의기양양하게 말을 보탰다. "싸인 본입니다." 궁금증이 더욱 밀려왔다. 참지 못하고 손님에게 사진집의 주제에 관해 물었다. 아내에게 선물할 정도면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친절한 답변이 돌아온 후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지금 비닐을 뜯을 테니 함께 사진을 보자는 거였다. 내 입장에서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내분에게 하는 선물인데, 아내분이 뜯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내가 물었더니 손님이 웃으며 답했다. "비닐에 쌓여있지 않았다고 하면 되죠. 같이 보시죠. 하하." 그의 배려에 감동이 밀려왔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를 좀 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카와시마 코도리의 사진집 '사란란'의 비닐이 벗겨졌다. 책을 열어준 손님에게 작품에 관한 정보를 들으며 우리 넷은 동그랗게 모여 함께 사진을 감상했다.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일본인 작가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그냥 지나쳤을 법한 흔한 일상이 그에겐 뭐가 그토록 흥미로웠을까? 타국인인 탓인지 작가의 소양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피사체는 신선했다.
이후에도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와 삶에 대한 관점을 늘어놓았다. 처음 '피사체'에 들어왔을 땐, 공간은 세 명의 무리와 나 한 명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것은 공기를 가르는 벽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이지 않던 벽은 허물어졌고 넷이 함께 하는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좋아하는 것이 같단 이유로 처음 본 사람들은 내면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끄집어냈다. 그것은 마음의 벽까지 허물어졌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느덧 우리는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을 맞았다. 떠나기 전, 인스타 아이디를 주고받았다. 어느 곳에서든 오늘처럼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반갑게 인사하길 바랐다.
살면서 미치도록 사랑하는 일을 만났다는 건 언제나 내게 큰 자랑이자 행복이었다. 지금은 사진을 일로 만나진 않지만 일상에서 늘 함께하고 있다. 일상의 우연으로 사진을 진지하게 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내가 원래 가려고 했던 날에 피사체를 갔다면 이런 기막힌 일이 일어났을까? 이날의 행복은 우연과 사랑하는 것이 만들어 낸 행복이었다.
내게 '피사체'를 소개해 준 J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