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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행복조각

하늘을 봐야해 / 시험에 통과한 날 / 아직까진 다행이야

by 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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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아무리 뜨거워도 하늘을 봐야 해.


이게 맞아? 공식적으로 기록된 한낮의 기온은 37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체감 온도는 그 보다 몇 도 높은 38.5도. 사람의 정상 체온 범위를 훨씬 웃도는 숫자였다. 버스 정류장에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거야 말로 공식적인 표현일 뿐 체감 표현을 빌리자면 얼굴은 쏟아진 폭우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드는데 하늘에 하얀 구름이 슬쩍 인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하늘을 보지 않은지 벌써 며칠이나 된 것 같았다. '매일 보던 하늘이었는데 왜...' 아마도 그건 뜨거운 태양을 피하려던 본능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치 패배자가 된 것 같았다. 그깟 태양이 뜨거우면 얼마나 뜨겁다고 하늘도 보지 않고 살았다니. 사실 살인적으로 뜨겁긴 했지만. 하하...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더 적극적으로 치켜세웠다. 그리고 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약간 탁하긴 했지만 하늘은 분명한 파란색이었다. 구름은 크리미 한 하얀색이었다. 두 색이 만들어 낸 대비감이 언제나처럼 조화로웠다. 불볕더위에 찌들었던 불쾌함은 하늘의 예쁨으로 씻겨지고 있었다.


'그래, 아무리 뜨거워도 하늘을 봐야지. 이렇게 좋잖아!'


하늘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치 물을 보고 있을 때와 비슷하다. 물과 하늘은 닮았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밝음을 주는 마음이 닮았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깊음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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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말부터 시작된 발목 통증이 한 여름까지 계속될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달리면서 느끼는 통증은 이제 거의 없고 달린 후에 관리를 조금 해줘야 하는 수준으로 많이 좋아졌다. 다시 다칠까 봐 페이스를 끌어올리지 못해 답답했지만 달릴 수 있단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지내고 있는 중이다.


이날도 여전히 푹푹 찌는 날이었다. 60분을 뛰어야 하는 일정이었는데 도저히 낮에는 달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괜한 객기를 부렸다간 응급차에 실려갈지도 모른단 생각에 뜨거운 공기가 숨을 고르기만 기다렸다. 저녁 6시가 넘어가자 뜨거웠던 바람이 뜨뜻한 바람으로 바뀌었다. 러닝복으로 갈아입은 후 500ml 소프트 플라스크에 시원한 물을 가득 채웠다. 운동화 끈을 단단하게 조이고 스트레칭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오늘도 욕심내서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자'


첫 발을 딛는데 느낌이 좋았다. 최근에 달린 어떤 때보다 경쾌한 게 느낌이 좋았다. 양볼을 가르는 바람의 질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속도가 꽤 올라가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워치를 보지 않았다. '천천히'와는 거리가 먼 페이스일 게 뻔했으니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기분을 충분히 만끽하고 싶었다.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 내 몸을 믿어보고 싶었다. 그러자 볼에서 부서지는 바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발목이 아주 약한 신호를 보냈다. 조금 전에 20분이 되었단 알람이 울렸으니까 아마도 25분 정도 지났을 것 같았다. 워치를 보니 5분 대 초반 페이스로 달리고 있었다. '아직 이 정도는 무리구나...' 아쉽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은 여기서 만족해야 한다는 걸. 대신 조금만 더 달려서 5km는 채우고 싶었다. 그것도 안되면 30분이라도 채우고 싶었다.


페이스를 살짝 낮춘 후 발목이 보낸 신호를 살살 달랬다. 그렇게 30분 동안 5km를 달렸다. 평균 페이스는 6분. 부상 이후에 2~3km 정도를 5분 대 초반에서 4분 대 후반으로 잠깐씩 달려 본 적은 있지만 가장 빠른 평균 페이스는 6분 대 중반이었다. 이 정도 페이스로 5km 이상 달렸는데도 뛰고 나서 발목이 아프지 않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만약에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빠르게 달렸더라면 기록은 만족이었을지 몰라도 러닝은 망쳤을 거였다.


요즘 나의 러닝은 욕심을 내려놓는 법을 깨닫게 해주는 선생님 같다. 다행이다. 이날은 시험에 통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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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걷다 보면 도심에서 보기 힘든 새와 곤충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정돈되지 않은 머리처럼 이리저리 엉클어진 풀들을 만날 수 있는데 비가 내린 후엔 그 모습이 더욱 가관이다.


이날도 그런 길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자전거 도로와 잘 정비된 보행로가 다니는 길을 지지하는 콘크리트 옹벽을 왼쪽에 두고 걷는 중이었다. 옹벽에 뚫어 놓은 배수관 안으로 이름 모를 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엔 누군가 잡초를 뽑아 배수관에 쑤셔 넣은 줄 알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어쩐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저 넓은 흙바닥이 아닌 배수관에 스스로 터를 잡은 거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처음엔 호기심이, 다음엔 이상함으로, 이후엔 대단하단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생명력이란 이런 건가? 이곳이 어디든 끝까지 생존하려는 본능?


남들 하는 데로 사는 게 진리라는 사람들의 말을 뒤로했었다. 보편적인 선택을 거부했었다. 나를 어릴 때부터 봤던 절친 중 한 명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너는 아버지가 일궈 놓은 것만 따라가도 편하게 살 텐데 굳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거냐고.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그냥 멋있게 살고 싶어서. 멋있는 건,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것 같아서.


돌아보니까, 멋있게 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멋없게 사는 것 같진 않다. 아직까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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