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선라이즈

by 윤기




이번 주 목요일은 2026년이 시작된 날이었다.


새해부터는 야행성 인간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사람들처럼 아침형 인간이 되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신년 파티도 일찍 마무리 한 채 새벽 1시부터 침대에 누워버렸다. '뭐지...?' 갑자기 스윽 하고 눈이 떠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러닝을 하.. 자...' 분명 이런 생각을 했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언제 잠에 든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쉽게 잠들어 버렸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반쯤 뜬 눈으로 왼쪽 손목을 보니 새벽 6시 반이었다. '오... 나도 드디어 이렇게 아침형 인간이 되는 건가?'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는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목이 말랐다. 거실로 나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낸 후 소파에 몸을 실었다. 목구멍을 열고 차가운 물을 들이켜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아침형 인간으로의 진화는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리모컨을 집어 들고 OTT에 미리 찜해두었던 영화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멈춘 건 '러브 미'에서였다. Love Me 라니... 그야말로 이 타이밍에 딱 어울리는 제목이었다. 아침부터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해를 맞아 새 어른이 된 것 같아 괜히 뿌듯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는구먼!' 소파 옆에서 노란빛을 따스하게 쏟아내는 조명이 마음까지 데워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번쩍 뜨였던 눈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예상한 것과 많이 달랐던 영화 도입부 탓일까? 아니면 새벽형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본능 탓인 걸까? 총 네 번의 거친 저항이 있었으나 결국엔 잔뜩 축 처진 눈꺼풀에게 나는 패배하고 말았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후...' 힘없이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한숨을 크게 토해낸 후에 이불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갔다.


'응...? 지금 몇 시지?'


뭔가 싸한 느낌과 함께 눈이 번쩍 뜨였다.(하루에 벌써 두 번이나 눈을 뜨고 있다... 하...)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잠깐만 자고 일어나야지 했는데 세상모르고 자버렸다. '새해'라는 타이틀을 달고 이것저것 열심히 일정표를 짰는데 네 개의 할 일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당장 하루아침에 바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짜증이 났다. 하지만 새해 첫날부터 짜증만 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계속 그랬다가는 일 년 내내 짜증 나는 일만 생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서둘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오늘은 빨간날이잖아? 그러니까 오늘까지는 그냥 편한 마음으로 쉬자!'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자기 합리화라는 건 두통약과 비슷한 게 아닐까?


맞다! 방해금지모드를 켜놨던 게 생각나 서둘러 폰을 봤다. 달콤한 꿈나라로 떠나 있는 동안(그것도 남들 다 일어나 있었을 시간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새해 인사가 도착해 있었다. 어떤 건 3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늦었지만 도착한 순서대로 답장을 보냈다. 한참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갑자기 뭔가 욱하고 올라왔다. '아니... 설날에도 새해 인사를 또 해야 하는데 매년 이렇게 두 번씩 하는 게 맞아?' 고마운 줄도 모르고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아침형 코스프레 여파가 만만치 않단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런 생각을 매년 하긴 한다. '새해 인사 한 번만 보내기 같은 캠페인은 없는 걸까?'란 생각을 수도 없이 해왔다. 하지만 인사를 건넨 사람은 죄가 없다. 작든 크든 모두 나를 생각해서 보낸 따뜻한 마음이니까. 따지고 보니 나도 누군가에겐 새해 인사를 두 번씩 챙겨야 하는 사람이었다. 역지사지는 역시 무적이다. 철없던 생각을 했던 게 뜨끔해서 더욱 감사한 마음을 담아 새해 인사를 보냈다.(저한테는 한 번만 보내도 되고 안 보내도 서운해하지 않을게요. 크크.)


인사를 모두 드린 후 순서에서 밀려있던 알림을 다시 살펴봤다. 메일과 할 일 알림 몇 개를 지우자 브런치 스토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24시가 되자마자 프롤로그를 발행했었지...' 설레는 마음으로 브런치 알림을 눌렀더니 '좋아요'와 '댓글'을 남겨 준 독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앗싸 1등!'이라고 외치며 올해의 첫 댓글을 남겨 준 분은 애정하는 [마음의 온도 정 작가]님이었다.(꼭 선물 드릴게요!)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다. '새해 첫날이라 다들 바쁘셨을 텐데 잊지 않고 이렇게...' 감사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동공이 확장되며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눈물은 마음으로만 흘리기로 했다.(큰일이다. 감정 기복이 점점 심해진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계획은 집어치우고 빨래를 하기로 했다. 나는 꽤 그럴듯한 나만의 '빨래 철학'이 있다. 자고로 빨래는 원단과 색, 피부와의 거리에 따라 분류를 한 후 세제와 물의 온도와 탈수의 강도까지 다르게 세팅을 해야 한다. 한 가지 더! 건조기에는 옷을 넣지 않을 것! 옷을 '대단히' 사랑하는 사람은 건조기와 친해질 수 없단 게 나의 철학이다.(반박 시 당신 말이 맞음 따위는 하지 않겠다!) 대신에 빨래를 말릴 때는 제습기를 사용한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건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세탁물은 수건과 침구류밖에 없다.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긴 한데 나는 자신만의 빨래 철학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무튼 그렇다. 올해 첫날, 세탁기는 세 번 돌아갔다.


거침없이 빨래를 마치고 창밖을 보니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허무했다. 이럴 거면 왜 신년 파티를 일찍 닫았던 건가 싶어 약이 올랐다. 억울해서 이대로 집구석에만 있을 순 없었다. 밖으로 나가야 했다. 특별히 갈 곳은 없었지만 한강이라도 걷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은 한파 주의보가 내린 상태였다. 조심스럽게 날씨를 확인해 보니 체감 온도가 영하 12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걸 보자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빨래 철학에 이어 투 머치 인포메이션 하나를 더하자면 내가 군 생활을 했던 철원에선 이 정도 기온은 늦가을 날씨와 다름없다. 즉, 영하 12도 정도는 선선하다는 뜻이다. 그곳에선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가도 여고생들이 치마를 입은 채 걸어서 등교한다. 진짜다. 위병소 근무를 서며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게 철원 나라의 흔한 풍경이다. TMI 진짜 끝.


한강을 걸었다. 역시 한파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조금 걷다 보니 아주 용감한 청년들이 티셔츠만 입고 농구를 하고 있었다. 청춘은 역시 위대했다. '자네들도 혹시 철원에서 근무를?' 농구장을 지나치자 다시 사람을 보기 힘들어졌다. 선선한(철원에서 근무한 사람에겐 분명 그러한...) 강바람을 맞으며 청담대교 아래를 지날 때 문뜩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어떤 글로 올해를 채워야 할까?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한 해를 보람차게 보낼 수 있을까?' 평소에도 이런 식의 자문자답을 자주 하는 편인데 이번 물음엔 답을 바로 할 수 없었다. 강물을 보며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나름 괜찮다고 평가받는 메타인지력에 비추어 보면 나는 대단히 번뜩이는 기획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소위 말해 미친 글빨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냥 쓰는 것밖에 없었다. 발전 같은 생각은 때려치우고 '그래! 올해도 지난 2년처럼 그냥 엉덩이 깔고 써보자!' 이렇게 정리하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느닷없이 알게 된 건데 자기 합리화라는 건 생각보다 회복탄력성에 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여태까진 변명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요즘은 남자의 마음도 갈대니까... 지나칠 정도로 빠른 회복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나는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목요일의 사건]이라는 거... 정말 괜찮은 걸까...?'




[2026-01-01 21:39] 한 밤이 되어서야 만난 나만의 선라이즈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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