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색 카페

by 윤기





여행에서 돌아와 맞은 첫 번째 목요일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말썽을 부리던 카메라를 고치지 않고 여행에 데려갔던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 정도 고장이야 숙련된 기술로 충분히 커버할 거라 자신했건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더해졌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깥양반과 조카의 기념사진을 찍어주려는데 오토 포커스 기능이 제 멋대로 널뛰었다. 계획대로 될 리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나흘 동안 진땀을 빼게 만든 고장 덕분에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귀국하자마자 수리를 맡기려 했지만 도통 짬이 나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이 지나서야 을지로 3가에 있는 서비스 센터를 찾았다. 오전 일찍 수리를 맡겼지만 부품 문제로 당일 수리는 절대 불가능하단 말이 돌아왔다. 그런 무서운 말을 하면서도 무해한 얼굴을 하고 있던 담당자의 모습이 나를 더 당혹스럽게 했다. 한두 시간이면 수리될 거란 후기들을 믿고(도대체 무슨 근거로?) 근처 카페에서 여유나 부릴 생각이었건만 역시나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다. 쓴웃음을 지으며 접수증에 연락처를 적은 후 천천히 몸을 돌려 쓰러지듯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14층짜리 건물을 등지고 서서 휴대폰의 지도 앱을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가야 할 곳이 딱히 보이지 않아 남산이 보이는 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조금 가다 보니 어느새 충무로였다. 길가에 늘어선 카메라 매장을 보자 작년 가을부터 갖고 싶던 필름 카메라가 떠올랐다. 안면이 있는 매장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직원에게 찾고 있던 모델을 말하자 카메라를 꺼내주었다. 가격을 물어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20만 원이나 비쌌다. 흥정을 할까 하다가(충무로는 으레 흥정이 가능한 곳이다) 그만두었다. 몇 번 마주쳤던 직원과 달리 오늘 처음 본 직원의 응대는 어딘지 모르게 마땅찮았다. 결국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도로 물렀다. 어쩌면 지갑을 열고 싶지 않은 이유를 궁상맞게 찾아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충무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카메라 매장을 나와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이번엔 명동이었다. 한국 사람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곳. 오늘따라 이 거리가 더 낯설게 다가왔다. 그곳에서 나는 마치 이방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명동 성당이 보이는 길 한복판에 서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일단 여기를 떠나자.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으로 가자.' 그러자 딱 한 곳이 떠올랐다. 오렌지색 카페였다.


롯데백화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지나 도착한 곳은 중림동이었다. 3년 전 겨울, 저마다 개성을 뽐내던 가게들 틈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던 카페가 있었다. 오렌지색 어닝과 실내 곳곳을 같은 색으로 채운 곳이었다. 자석처럼 끌리듯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 중 하나는 좁디좁은 카페 한편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귀여운 시바견 때문이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반려견과 산책을 나온 주민들이 사장님 모녀와 안부를 주고받았다.(나는 이들 모녀를 큰 사장님, 작은 사장님으로 부른다.) 카페엔 커피 향뿐 아니라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그랬던 그곳엔 더 이상 오렌지색 카페가 없다. [다 잘됨 하우스]를 발견했던 지난달 목요일, 서울역 주변을 지나던 중에 카페가 근처로 이전한 걸 우연히 알게 되었다. 버스에서 내린 후 3분 정도 걷자 새로 오픈한 오렌지색 카페가 보였다. 카페 주변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을지로와 충무로에 이어 중림동까지... 오늘은 안 되는 날이구나 싶어 걸음을 멈췄다. 그냥 집에나 갈까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아쉬워 마음을 바꿨다. 카페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 어깨너머로 오렌지색 문을 멀뚱히 보는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림잡아 여섯 명은 족히 되는 사람들이 카페 문을 열며 쏟아져 나왔고 밖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큰 사장님께 커피를 받자 바쁘게 자리를 떠나는 거였다. 단 2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제 밖에 있는 사람이라곤 나 혼자였다. 계단을 올라가 카페 안을 들여다보니 2인용 테이블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자 왔는데 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간절했던 눈동자를 가엽게 보았던 걸까? 작은 사장님은 밝은 미소와 함께 편하게 앉으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의 상냥한 응답에 아침부터 엉켜있던 마음이 한순간에 헐거워지고 있었다.


카페는 크기만 달라졌을 뿐 분위기는 여전했다. 노란색과 미색과 오렌지색이 나무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공간. 오브제들은 여전히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전하기 전, 좁은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던 특별함은 덜해졌지만 누가 보더라도 같은 주인장인 걸 알 수 있을 만큼 따뜻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내게 허락된 곳은 햇볕이 포근하게 들어오는 창가 아래의 자리였다.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어 얌전하게 의자에 걸쳐둔 후 지갑을 챙겨 작은 사장님에게 갔다. 밀크티를 주문하는데 마침 구워지고 있던 고소한 빵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소금빵도 함께 달라고 말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책을 펼치자 사방에서 이야기가 쏟아졌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그들을 훔쳐봤다. 설거지를 절대 하지 않는 남편을 흉보는 여자, 어떻게 하면 돈가스에서 생선가스 맛이 날 수 있느냐며 식당 주인 솜씨에 혀를 내두르는 할머니, 허구한 날 퇴직할 거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망할 부장 놈 욕을 찰지게 주고받는 어떤 남자와 여자. 말하는 사람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듣는 사람은 주억거리며 열심히 추임새를 넣는 중이었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한 것 같아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순되게도, 이들의 열띤 뒷담화가 내겐 평화로움으로 다가왔다. 명동 한복판에서 이방인 같던 내가, 불과 20분이 지나지 않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게 놀라웠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카페는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열심히 수다를 떨던 이들은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고 큰 사장님은 시바견과 짧은 산책을 다녀왔다.


읽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시계를 보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겉옷을 여미는데 안에 받쳐 입은 옷을 보고는 웃음이 터졌다.


오늘 아침, 오렌지색 니트를 꺼내 입었던 건 우연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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