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번째 주, 매년 맞이하는 생일
이번 주는 나의 생일이 있었다.
6월 6일. 현충일.
거국적으로 보자면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친 애국자분들을 기리는 날이니, 내 생일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중요한 날이다. 다만, 현충일이란 의미와 굳이 견주지 않더라도 생일이란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기념일에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도 부담스러워, 기본 설정된 카카오톡의 생일 표시까지 찾아가 꺼두는 타입이다.
몇 년 전이었나. 혹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느냐며 조금은 유난스럽단 뉘앙스의 말을 던지기도 했었는데, 그때 난 이렇게 답했다.
"연락받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연락이 와서요."
"아... 윤기 씨는 인기가 많은 사람인가 보네요."
사실을 아무 생각 없이 말했는데, 뭔가 빈정대는 것 같은 말과 표정이 섞여 돌아오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아 재작년부터는 아예 생일의 'ㅅ'자도 꺼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생일이란 것을 보편적인 사람보다 훨씬 사적인 영역으로 생각하는 편이라 그럴 거다. 괜한 떠들썩함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고. 이렇든 저렇든 복잡하고 예민한 성격이(까칠하기도 한) 한몫을 차지하는 것이 가장 클 테다.
5일 오후 4시 33분.
친한 형 K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야! 시간 좀 내달라니까. 네 사케 안 가져갈 거야?"
5월 초였나. K에게서 카톡으로 사진 하나가 왔다. 사케를 결제하고 있는 사진이었는데(아마도 언제나 그렇듯, 점원에게 부탁해서 찍었을 거다) 내 생일 선물로 4월에 주문한 게 이제야 도착해서 결제하러 왔다는 거였다. K가 지나가는 말로 파티하면서(유부남이 무슨 파티야) 맛있게 마시잔 말을 했었던 것 같긴 한데... 바쁨을 핑계로 결국 생일 전엔 만나지 못하게 됐다. K는 서운해하기는커녕 곧 자신의 셀러에서(혼자 사는 K의 비어 있는 냉장고엔 사케밖에 없으니 K는 그걸 셀러라고 불렀다) 탈출하게 될 사케를 생각하니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형, 미안해. 내 생일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우리는 다음 주에 만나자. 고마워 형."
5일 저녁 8시 51분.
친구 T에게 메시지가 왔다.
"생일 미리 축하해. 다음에는 만나서 축하해 줄게!"
이번 달 초. 강원도로 출장을 가 있는 친구 T였다. 3일 저녁에 통화할 때, 같이 소주 한잔하면서 축하 파티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했던, 멀리 있음을 아쉬워했던 T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연휴에 가족을 맞이해야 하는 터라 혹시 깜빡하고 챙기지 못할까 봐 미리 연락했다고 말했다. '요즘 감기가 지독해서 아직 낫지 않았을 텐데...' 달리 감동을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진 않고... T가 출장에서 돌아오면 소주 한 잔 사줘야겠다.
"좋지 않은 컨디션에 가족들 챙기기도 벅찼을 텐데, 생일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
6일 오전 12시 5분.
아내가 케이크의 초를 꼽고 불을 붙인다.
"여보, 생일 축하해!"
늦은 업무를 끝내고, 겨우겨우 12시 전에 맞춰 들어온 아내가 생일 축하한다며 손에 든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놓은 후 자그마한 불빛의 초와 함께 노래를 불러줬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지그시 눈을 감은 후, 양손에 들어갈 만큼만 소원을 모은 뒤 촛불에 '후-'하고 뱉어냈다.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보냈는데 한 번에 꺼지진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다 꺼졌으니까 소원은 이루어질 거다. 소원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하기로 했다.
"바빠서 케이크 살 시간도 없었을 텐데 매년 이렇게 챙겨줘서 고마워."
6일 오전 7시 22분.
잠에서 깨자마자 눈을 비벼서 그런지 초점이 맞질 않는다.
침대 옆으로 이어진 하얀 선을 더듬어 어둠을 이겨내고 충전이 100% 되어 있을 폰을 집었다. (퀸사이즈 침대가 놓인 안방은 암막 커튼을 쳐 놓아서 항상 어둡다) 흐린 눈을 한 채 방해금지 모드를 해제하자, 잠들었던 사이 도착한 메시지들이 짙은 밤하늘 위의 별처럼 화면 위로 쏟아졌다.
"윤기야 생일 축하해." (배민 5만 원 교환권)
"친구 생일 축하해!" (투썸플레이스 케이크 교환권)
"형님 생일 축하드려요" (스타벅스 5만 원 교환권)
"오빠! 생축생축!!" (고추바사삭 콤보 교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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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생일 축하해. 계좌로 20만 원 보냈다. 맛있는 거 사 먹어."
축하 인사를 건넨 모두의 메시지를 하나하나 읽었다. 전해온 마음의 크기만큼 감사 인사를 돌려주려고 했으나 그걸 온전히 감당해서 돌려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수하는 것도 잊은 채 엄마, 친구, 동생, 지인들에게 행복함을 고백하고 나니 아까부터 들려온 꼬르륵 소리의 의미가 선명해졌다. 굳이 알리지 않은 축하 인사를 받으려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날 사랑해주는, 당신들의 크디큰 마음을 알기에 또다시 1년을 풍족하게 보낼게요. 고마워요."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것. 알리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주는 마음. 5일과 6일에 일어난 일을 말하자면, 외우거나 달력에 따로 적어두어야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카카오톡에 표시되는 생일 알람 설정을 해제한 상태니까,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은 이상 6월 6일은 현충일이거나 공휴일 외엔 다른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날이다. 애써 기억해 내서 수고로움을 자처하는 것. 날마다 각박한 삶에 치이고 있을 텐데, 그 고됨을 누군가의 생일과 바꿀 수 있을 만큼의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던 걸까라고 생각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게 느껴진다.
이토록 뜨거워진 고마움을 꼭 안고, 2024년의 6월 6일도 2023년의 6월 6일처럼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