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기 May 26. 2024

페르소나, 진짜 나의 모습

스물한 번째 주, 관계마다 다른 나의 모습에 대하여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관계마다 다르게 보이는 '나'의 모습 말이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절친과 소주 한 잔 기울일 때, 직장 동료와 점심을 먹을 때, 함께 재테크를 공부하는 지인들과 스터디를 할 때, 심지어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나와 글 쓰는 '나' 사이에도 간극이 있을 정도다. 다른 자아를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룹(?)마다 보이는 모습의 차이가 있기에 내가 만든 페르소나에 대해 본질적인 궁금함이 생긴 한 주였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장남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곤 한다. 오전까지만 해도 잘 되던 컴퓨터가 속 썩일 때도, 재개발 동의서에 찬성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도 부모님은 나를 필요로 한다. 나를 돌봐주시던 부모님이 이제는 나의 돌봄이 필요한 삶으로 점점 흘러가고 있다는 걸 문뜩 인지하게 될 때, 더욱 내 역할의 중요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거목 같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느새 나보다 작아 보이는 건, 노년을 건강하게 보내야 한다며 시작한 다이어트 때문만은 아닐 거다. "아들, 별일 없지?"라는 엄마의 물음에, 단 1초라도 망설이면 "별일 있지만 엄마한테는 말하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로 들리게 될 걸 알기에 언제라도 "그럼. 잘 지내지"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나이를 이만큼 먹었는데도, 부모님에겐 자식이니까 항상 걱정되는 존재인가 싶다. 건강하고, 잘 지내고, 언제든 부모님을 돌볼 수 있어야 하고, 훗날 부모님이 부재할 때가 오면 결혼한 여동생의 친정이 될 수 있는 나.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는 이런 모습이다.


절친들 사이에서 나는 많이 풀어질 수 있다. 소름 끼치도록 재미없는 이야기에도 억지웃음을 짓지 않아도 되며 "더럽게 재미없네"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고, 쌍시옷이 섞인 욕을 들어도 불쾌하기는커녕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런 상태로 전환된다. 주량을 넘어선 술을 마셔도 실수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내가 된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오며, 사소한 것까지 날것 그 자체의 모습을 공유한 사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그 시절의 모습을 알기에 멋져 보이고 싶어 폼을 잡으면 잡을수록 우스워 보이는 게 자연스럽다. 친구들이나 내가 사회적으로 이루어 낸 것들이 그저 그런 껍데기가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게 너무도 편안해서 느슨해질 정도의 모습이 된다.


지인들과 있을 때는 약간 정제된 모습을 갖추려 한다. 단어 선택도 조금은 신중해지고, 모임을 할 때도 상대적으로 톤 앤 매너에 신경을 쓴다. 뭐랄까 비즈니스 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절친들 보다는 거리를 두는, 그 사이 어딘가에 경계의 선을 만든다고나 할까. 정제된 모습을 한다고 해서 너무 어렵게 대하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관계가 불편하면 인연을 이어가는 게 힘든 성향이라 최대한 편하게 하되 약간의 필터링을 하는 것뿐. 어떻게 보면 가식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위선이 아닐 정도의 꾸밈은 암묵적인 질서가 있는 사회에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이 정도의 모습으로 나를 정의한다.


산책하며 스스로 대화를 나눌 때만큼이나 나에게 집중하는 순간이 글 쓰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때의 모습조차도 다름이 존재한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와 브런치에 글을 쓸 때가 그렇다. 블로그에서의 나는 대부분 400자 내외 정도로 짧은 호흡의 일상을 적는다. 일상에서 글감을 찾기 위한 훈련용으로 시작한 건데, 이것도 하다 보니 나름의 재미가 들려 가급적 긍정과 행복에 포커스를 맞춘 글을 쓰려고 하는 편이다. 매일이 행복하고 긍정적일 수 없지만 그렇게 쓰려고 하면 소소함 속에서 행복을 찾게 되는 마법 같은 일을 경험할 수 있다. 그 맛을 알게 되니 블로그에서의 나는 가급적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려고 애쓴다. 반면 브런치에서의 나는 비교적 진지하다. 내면의 목소리에 보다 더 집중하려는 편이고, 우울하거나 화나는 것처럼 별로 달갑지 않은 감정도 마주하려 노력한다. 한 번씩 만나주지 않으면 어디론가 숨어버려 불쑥 나타날지 모르기에, 썩 반갑진 않지만 내 것인 이상 그런 감정조차 보듬어 주려 한다. 행복한 감정은 보다 더 오래, 깊게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다 보면 행복한 감정이 몇 배가 되어 시간을 거스를 만큼의 크기가 된다. 브런치에선 그런 모습으로 지낸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같아도 이렇게나 '나'의 모습은 다르다.




이번 주 가족, 친구, 후배, 지인에게 나의 모습에 대한 설문조사를 할 일이 있었다. 10개가 조금 넘는 문항이었고, 그룹별로 대표자를 설정해서 8명에게 설문지를 전달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름대로 관계마다 다른 모습의 '나'를 보여주며 살아오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난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물론 아주 다른 사람일 만큼(그게 가능한지도 모르겠지만) 철저하게 꾸며내진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틀에 걸쳐 받은 설문지의 결과는 놀라웠다. 그들이 본 나의 모습은 상당히 비슷했다. 장단점은 특히 더 그랬다. 그들끼리는 서로를 마주한 적이 없으니 그룹마다 다른 '나'의 모습을 봤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게 재밌었다. 물론 답변이 일치하지 않은 것도 많았지만 그것마저도 겹치는 그룹이 있거나 뉘앙스가 비슷했다.


결국 어떤 페르소나를 보여주더라도 '나'라는 모습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동안 내가 보여줬던 모습이 진짜 '나'여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괜한 짓을 했던 건가 싶기도 하고, 이런 행위가 무엇을 위해 필요한지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은 답을 얻을 만큼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시간을 갖고 페르소나에 대해 '나'와 대화해 볼 필요가 있음을 느낀 한 주였다.




이전 21화 꿈, 소소한 꿈도 괜찮은 거잖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