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한 번째 주, 어두운 터널을 나와야 할 때 신뢰해야 할 것
이번 주는 욕망에서 시작된 기다림이란 터널을 빠져나와야 했던 시간이었다.
올해 초였다. 재작년부터 세웠던 사업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어려워진 게 문제였다. 눈앞에 닥친 어려움은 자금의 유동성이었지만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미리 세운 계획에 실수가 있었다. 복기해 보니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부분의 비중이 너무 컸었다. 실수를 인정하고 손해를 감수했다. 처한 상황에서 데미지를 최소화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 터진 사건을 그렇게 꾸역꾸역 막아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확인의 확인을 거쳤고,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컨트롤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서 다음에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간을 가지고 나서야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지만 그대로 마냥 안주할 수는 없었다. 배움은 반성과 성장의 재료로 사용하면 되는 것이고, 발생한 손해는 어떻게든 다시 메꿔야 한단 생각에 사로잡혔다. 평화는 잠시일 뿐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목이 말랐다.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자 이어진 건 조급함이었다. 상반기에 진행하지 못한 프로젝트를 하반기에는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 했음에도 상황이 여의찮아 당장 뭘 할 수가 없었다. 참고로 나는 농사를 짓는다고 표현하는데, 보통 상반기에 한 번, 하반기에 한 번 1년에 두 번의 농사를 짓는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연초에 일어 난 일처럼) 꾸역꾸역 해결할 수 있는, 무리하다 넘어지지 않을 정도의 선을 정하다 보니 이 정도 템포가 나에겐 적당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썼던 순간에도 씨앗을 뿌릴 장소를 계속해서 예의주시했었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고 당장 씨앗을 뿌릴 곳을 찾지 못하면 한 해 농사를 망칠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를 감지한 욕망은 날 채근했다. 무슨 수라도 써야 해야 했지만 손발이 묶인 나에겐 조급함만 더해질 뿐이었다. 당연히 세상은 날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럴 때일수록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겜블러의 포커페이스처럼 조바심 가득 찬 욕망을 평정심으로 덮어 버리고 싶었다.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모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해갈되지 않은 목마름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모험이라는 것이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것인지, 무모함인지 판단이 쉽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깊이 들여다보니 확신할 순 없지만 무모함에 가까웠다. 아마도 욕망이 무의식중에 나를 컨트롤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됐다. 어찌 되었든 난 무모함을 넣어두고 평정심을 찾고자 기다림을 택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무기력하게 기다려야만 한다니... 기약 없는 기다림은 끝나지 않는 터널을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만이라도 터널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날 목마르게 만든 건 고작 몇 개월 정도의 변화였다. 이 일을 10년을 해왔다. 그사이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견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성과를 이뤄왔다. 그것들은 온전히 나의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었다. 아무도 몰라도 되지만 나는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였다. 차근차근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뿌옇던 렌즈가 깨끗해지며 저 멀리 빛이 보였다. 기다림이란 어두운 터널이 끝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나를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자 가까운 곳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기다림이라는 게 그렇다. 나에게 신뢰가 없을 때의 기다림은 끝없는 터널을 걷게 만들지만, 지나온 나의 역사를 믿을 수 있다면, 기다림은 어두운 터널이 아닌 환한 세상으로 가기 위한 또 한 번의 발자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면 언제나 첫 번째는 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