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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우 Oct 06. 2022

7. 천사가 내려왔다.

지리산 길 위 학교 에피소드 7

  새벽 5시! 기상! 드디어 천왕봉을 오르는 여정의 시작이다. 이른 조식을 먹고 주먹밥 도시락을 챙겨 길을 나선다. 캄캄한 새벽, 랜턴과 휴대폰 조명을 켜고 한 걸음씩 내딛는다. 다 죽어가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현태가 말한다.

  “선생님! 머리가 아파요. 우웩! 캑! 캑! 토 나올 것 같아요.”  


  출발하려는데 신발 끈을 안 묶었다. 끈 묶으니 다시 기침하고 머리 아파 약을 먹는다. 어제 산 등산화가 꽉 조여 발이 아프단다. 천왕봉을 위한 만반의 채비를 하였건만, 현태는 출발 시간을 30분이나 지체한다. 현실과 달리 재욱 선생님과 경석이, 나는 벌써 마음이 천왕봉을 올랐다 내려가고 있었다.  


  “힘들어도 같이 가 보자. 초반에는 가파른 길이라 좀 힘들 거야. 가다 쉬다 하는 건 괜찮지만, 주저앉아 자주 쉬면 더 지치니까 힘내자.”


  애써 독려하며 함께 걷는다. 걷다 보니 금세 동이 터 온다. 여명의 신비로움과 겨울 깊은 산의 신선함이 가슴을 정화시켜준다. 눈까지 소복이 내린다. 오늘 운이 좋다. 어둠의 길을 지나 단풍 빗길을 걷고 겨울눈 쌓인 고요한 길을 간다. 그런데 경석이가 안 보인다. 이 녀석 천천히 같이 걷자 했더니 벌써 혼자 올라갔나. 꾸역꾸역 가기 싫은 걸음을 내딛는 현태를 앞뒤로 챙기며 한참을 가니, 저만치 위에서 경석이가 웃으며 혼자 말랑카우를 먹으며 웃고 있다. 혹여 경석이가 짜증 낼까 미리 예방주사를 놓는다.


  “경석아! 속도 맞추기 힘들면, 먼저 가거라. 장터목 대피소에서 점심 먹을 거니까, 먼저 가서 거기 기다려.”

  “아니에요. 우린 한 팀이잖아요. 이렇게 먼저 가면서 기다리면 돼요. 간식도 먹으면서 기다리니까 괜찮아요.”


  짜증과 신경질, 그리고 혼자 먼저 가겠다는 말을 예상한 나는 당황했다. 어라! 이 녀석 뭐라고? 한 팀? 그 말이 참 듣기 좋았다. 감동 중에 선물 하나 더! 


  “선생님! 우리 천왕봉 올라가면 기념사진 같이 찍어요.”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뭐지? 같이 사진을 찍자고? 지금껏 한 번도 같이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여러 번 권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같이 찍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와는 안 찍어도 지나가는 여행객에게는 사진도 찍어주고 자기 사진도 찍어 달라 부탁했는데, 천왕봉 가서 같이 사진을 찍자니 이 무슨 말인가. 믿기지 않았고 좋았다. 천사가 내려왔나? 

  오늘의 주인공은 현태다. 평소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아 과체중에 통통한 몸, 초등학교 때부터 흡연해 온 폐, 이렇게 주기적인 고난도 펌프질이 당황스러운 심장. 적당히 시간 때우면 그냥 내려갈지 모른다는 기대. 이것들이 똘똘 뭉쳐 현태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독려하고 기다리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경석이가 너무 오래 보이지 않아 현태는 재욱 선생님에게 맡기고 경석이를 따라 잡기 위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산을 울리는 괴성이 들렸다.


  “우~워엉!”


  무슨 소리지? 반달곰인가. 경석이나 현태가 곰을 만난 것인가. 방향을 돌려 다시 내려가다 재욱 선생님과 현태를 만났다. 재욱 선생님의 표정으로 보아 괴성의 주인공은 반달곰이 아닌 현태였다. 목소리는 물론 몸매도 비슷했지만, 그래도 진짜 곰은 아니었다. 뒤이어 달려온 경석이도 놀랐나 보다. 무슨 일이냐 물으며 곰인 줄 알았단다. 

  기침을 얼마나 했는지, 침을 얼마나 뱉었는지, 몇 번을 멈추고 쉬었는지 모른다. 현태 기다리다 도를 깨우치겠다는 농담을 재욱 선생님과 주고받았다. 일부러 시간 끌어 천왕봉까지 안 나고 장터목 대피소에서 내려가려는 계획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현태를 생각할 때, 그렇게 사전에 코스를 확인하고 조사하고 계획을 짜서 대처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진짜 힘들고 그래서 처지는가 보다 싶었다.  


  “현태야! 갑자기 높고 힘든 산 올라가려니 힘들지? 우리도 힘든데 너는 더 힘들 거야. 일정보다 한 시간 이상 늦었지만, 그래도 한 걸음 한 걸음 잘 가고 있다. 너무 힘들면 천왕봉까지 안 가도 돼. 장터목에서 내려가는 길도 있으니까 일단 장터목까지 부지런히 가 보고, 점심 먹으면서 이후 일정 어떻게 할지 생각하자. 너를 억지로 천왕봉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를 겁주고 위협해서 그렇게 데려가서도 안 되는 거니까. 장터목까지만 힘내자.”


  현태는 장터목에서 내려갈 수 있다는 말과 억지로 데려가지는 않는다는 말에 안도감을 느꼈는지 힘을 내어 장터목까지 묵묵히 걸었다. 물을 끓여 컵라면을 먹고 숙소에서 주문한 주먹밥을 먹었다. 드디어 결정의 순간! 


  “야! 우리가 또 언제 지리산 천왕봉에 오겠냐? 1.5km만 가면 되니까 힘내서 한 번 가보자.”

  “그래. 너를 일부러 고생시키려고 데려온 게 아니야. 정말 춥고 힘들지만, 천왕봉에 올라 이걸 이겨냈다는 경험, 그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거야.”

  “나중에 생각하면 정말 이런 경험, 추억 다신 없을 걸?”


  속사포처럼 선생님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현태에게 오직 한 가지 결론을 촉구해댔다. 이윽고 현태가 입을 열었다. 


  “그냥 내려갈래요.”

  철썩 같이 믿고 있던 경석이도 거든다. 

  “다음에 날씨 좋을 때 다시 와요. 밖에 눈보라예요.”


  나는 고심 끝에 사진 찍기 좋아하는 재욱 선생님을 위해 한 가지 제안한다. 


  “재욱 선생님! 선생님의 의견도 중요하니까 천왕봉 찍고 내려오세요. 내가 아이들 데리고 내려갈게요. 이런 날씨에 설경 사진, 다시 만나기 힘들잖아.”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재욱 선생님이 대답한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같이 내려갈게요.”


  지리산에 내린 첫눈, 그 눈이 만들어낸 천왕봉 설경! 아직 얼지 않은 길을 아이젠 없이 걸어 천황봉을 볼 수 있는데. 아! 언제 다시 와서 볼 수 있을까. 아쉬워도 너무! 너무! 너무! 아쉬웠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이들이 내려가자는데, 두려움과 불안, 피로감을 호소하는데 어쩌랴.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눈보라가 잦아 들길 기다렸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출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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