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길 위 학교 에피소드 8
울컥할 것 같은 마음 가득 안고 하산이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 보다 눈이 더 쌓였다. 에이스를 자처하는 경석이가 앞장선다. 내려가기 시작한 지 몇 걸음 안 되어 경석이가 미끄러졌다.
“에이! 씨발! 왜 자꾸 넘어져. 병신같이.”
“경석아! 미끄럽다. 조심해. 천천히 가자.”
경석이는 듣지 않고 자기 속도를 내려한다. 눈길에서는 보폭을 짧게 하고 무게 중심을 천천히 옮겨야 하는데, 경석이는 눈 없는 날 하산하듯 긴 다리를 성큼 내딛고 펄쩍 뛴다. 미끄러짐은 100%다. 엉덩방아를 찧고 미끄럼을 탄다. 순식간에 예닐곱 번 넘어진다.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친다.
“에이! 씨발! 병신같이 이게 뭐야. 내가 등산화 산다니까 왜 운동화 사라 해 가지고. 씨발 이러려면 뭐 하러 지리산에 왔어. 내가 무슨 에이스야. 에이스가 뭐 이렇게 자꾸 넘어져. 18! 18! 18!”
급기야는 스틱을 집어던진다. 순간 모두가 정지화면! 그러나 이 또한 중요한 순간이다. 호통치고 잔소리해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나. 호흡하고 숨을 가라앉히고 스틱을 주워 경석이에게 다가간다.
“스틱 버리고 갈 거예요. 하나도 도움 안 돼요.”
“그래 너무 미끄러워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네.
“그래도 공금으로 산 거니까 챙겨 가야 해. 안 쓸 거면 배낭에 매달고 가자.”
“경석아! 이런 날씨에 에이스는 빨리 내려가는 사람이 아니고, 안전하게 다치지 않고 내려가는 사람이야. 그게 에이스다. 나는 네가 얼마나 빨리 내려가는지 관심 없다. 나는 오로지 네가 안 다치고 안전하게 내려가는 거 그것만 관심 있다.”
타박하지 않으니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말한다.
“이거 못 내려가요. 자꾸 넘어지잖아. 이걸 어떻게 내려가.”
“그래 맞아. 자꾸 미끄러지니까 힘들지만, 그래도 내려가야 해. 다른 방법은 없어. 천천히 조심조심 내려가 보자. 조금 내려가면 눈 없는 길 나오니까.”
배낭 아래 스틱을 묶는 끈을 찾았더니 없었다.
“끈도 없잖아요.”
“어. 그래. 끈이 없네. 괜찮아. 가방 속으로 넣으면 돼.”
가방 위로 넣고 끈을 조여도 헐렁하여 고정되지 않았다. 경석이는 계속 식식거리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는 수 없이 내 가방에 넣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한다. 겁이 났는지 자신감을 잃었는지 경석이는 나보고 앞장서란다. 나는 아주 조심조심 천천히 발을 디디며 내려간다. 경석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약간의 연출도 감행한다.
“어~! 어~!” 미끄러지며 비틀거리다 넘어진다. 몇 차례 넘어지면서 “이야. 진짜 미끄럽다. 이거 오늘 같은 날씨에는 누구도 쉽지 않겠는데.”
내가 자꾸 넘어지니까 마음이 풀렸는지 오히려 내 손을 잡아주고 걱정해 준다.
“선생님! 조심하세요. 너무 미끄러워요.”
“그래 고마워. 너도 조심해.”
몇 번을 더 미끄러지며 눈 길 구간을 무사히 내려왔다. 나도 넘어지고 경석이도 넘어졌지만, 신기하게도 하산 길 초입에서만큼 욕하거나 화내지는 않았다. 이후 눈 없는 구간에서는 파란 하늘 보인다고 너무 기분 좋다고 하다가 비가 쏟아지니까 다시 욕하고 화내기를 반복했다. 어쨌든 얄궂은 날씨만큼 변화무쌍한 감정 날씨의 기복을 지나 무사히 하산하였다. 몸과 마음 아무도 다친 사람 없으니 우리는 에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