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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우 Oct 06. 2022

9. 네가 정말 경석이니?

지리산 길 위 학교 에피소드 9

  중산리에 도착한 우리를 지원팀이 숙소로 데려다주었다. 각자 씻고 옷을 갈아입고 모였다. 돌아가면서 길 위 학교 소감을 나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얘기하는데, 흩어졌던 퍼즐이 하나씩 제 자리를 찾아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드디어 경석이 차례!  

  “오늘 지리산 내려오는데, 제가 욕을 했거든요. 화도 내고. 그런데 선생님들이 화를 하나도 안 내는 거예요. 그게 고마웠어요. 감사합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경석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꿈같았다. 종종 이런 시간에 발언할 기회가 있으면 영혼 없는 말 몇 마디 툭 던지고 입을 닫거나 패스! 그랬는데, 첫날부터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정말 오래 걸었더니 마음이 풀리고 입도 열렸나. 신기하고 감동받고 뿌듯했다. 경석이가 말하는 동안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능청스러운 유머도 쓴다. 풋! 아까 욕에 욕을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사람 맞나? 참 신기하기 그지없다. 저녁 먹는 내내 다른 사람들에게 반찬을 건네고 챙겨주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깔깔거렸다. 멀찍이 앉았어도 그 기분 좋음과 익살스러움이 느껴졌다. 생동감! 여유로움! 유연함! 친절함!  


  사실 어젯밤 속으로 기도했다. 아이들이 일생일대의 모험으로 천왕봉을 무사히 올라 가슴 터질 것 같은 환희와 성취감을 맛보게 해 달라고. 온통 나의 관심과 바람은 천왕봉 등극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곳까지 올라야만, 날씨가 쾌청하여 그것이 가능한 환경이어야만 아이들을 위해 내가 주고 싶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선물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어줄 거라고.  


  그런데 경석이의 소감을 들으면서 아하! 그게 아니었구나. 좋은 날씨에 천왕봉을 올랐다가 내려왔다면 경석이는 아직도 자기가 다른 아이들보다 나은 에이스라는 개념에 갇혀 있을 것이다. 우월과 열등의 시소 타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열등을 감춘 우월을 자기 얼굴로 삼으며 가면이 더욱 두꺼워졌을지 모를 일이다. 천왕봉을 직전에서 포기하고 내려온 것도, 눈이 쌓인 길에서 미끄러지며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낸 것도, 내려오는 과정에서 변화무쌍한 자신의 감정을 만나게 된 것도, 넘어지며 서로 손을 잡아주며 일으켜준 것도. 경석이가 갇혀 있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오는데 꼭 필요했던 경험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 내가 생각하고 바라던 것보다 더 귀한 것, 더 좋은 것을 주셨구나.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핑!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선생님! 저 오늘 사례담당 선생님 방에서 자도 돼요?”

  “그럼. 장흠 선생님에게 미리 상의하고.”

  “넹~!”


  선생님들은 따로 모여 그동안 지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아이들과 선생님들 밑바닥 드러낸 이야기, 지원팀 차량이 도랑에 빠져 견인한 이야기, 한 끼에 4명이 공깃밥 10그릇 먹은 이야기 등 끝이 없었다. 사람들도 이야기도 다양했지만, 주제는 한 가지 행복감이었다. 실수하고 다투고, 화내고 욕하고, 사고 나고 수습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3박 4일간의 행복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사람의 삶, 가상 세계가 주는 보상에서 깨어나 오롯한 진짜 내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내가 걷고 만나고 먹고 경험한 나의 이야기를. 

  회의 마지막에 너무 피곤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한 선생님들은 내일 오전에 서바이벌, ATV 사륜 오토바이 체험은 생략하고 바로 가서 쉬자고 하였다. 날씨도 춥고 갈아입을 옷도 없고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몇 가지 그럴듯한 변명을 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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