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주장)
깨닫는 과정
내가 직접 정리한 내용을 다시 한번 더 적어보면, 그 정리를 통해 나름 깨닫는다. 어떤 사건이나 감정을 글로 쓰다 보면, 즉 문자 메시지나 톡, 브런치 글, 손글 낙서장 등에 적다 보면 깨닫는다. 내 사고의 흐름을 느끼며 생각을 거듭하여 적다 보면 시작 부분에서 했던 말이 끝부분에서 달라져 있다. 깨닫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 반응은 다양하다. 누구는 똑똑하다고 하고 누구는 멋있다고 하고 또 누구는 지조없이 말을 바꿨다는 투로 말한다. 이 셋의 차이는 뭘까. 아는 이는 다 알고 있을테니 이 부분은 생략한다. 그 차이를 거론하면 말을 바꿨다고 말한 사람이 당황해할 테니까.
소크라테스를 만나자.
4대 성인 중에서 젊은 시절 내가 수용하지 못했던 성인은 소크라테스다. ‘젊은 나는 그의 단편만 봤겠지. 내가 거부하는 단편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을 테고 그리하여 멀리 했겠지.’
젊은 내가 나름 비판의식을 가지고 느꼈던 많은 단편들 중에서 한 가지만 언급한다.
우선 자신의 부인을 세계의 악처로 만든 것만으로 그는 멀리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아내는 가장 소중한 사람인데, 자신 곁에 있는 소중한 이를 챙기지 않은 무심한 사람으로 보여서다. 그리고 일흔을 넘긴 분이 성인이었다는데 법정에서 그렇게 긴 변론을 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당시 5백명의 아테네 재판관들은 이론에 젖어 있거나 이해력이 떨어지거나 등 무작위의 모집단으로 보이는데 그들 앞에서 변론을 길게 한 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며 의문을 품었다.
현재 나는 그의 생활사는 버리고, 내가 거부했던 인간사의 단편은 버리고, 그의 또 다른 단편만 보기로 한다. 아마도 새로운 깨달음에 마음 속 깊이 울지도 모른다. 그가 도달하려 했던 무지의 자각과 진지를 머리만이 아닌, 가슴으로도 조금이나마 느낄지 모른다. 감동과 슬픔의 울림이 절로 날 수 있다.
‘무지의 자각’에 도달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영혼의 산파’라 자칭하고 사람들이 ’진지’를 얻는 일을 그저 도울 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겸손한 조수로 여길 뿐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지성인은 고고한 자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착한 인간성을 자각하도록 도와주는 자, 곧 인간을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며 대중 속에서 사람들의 슬기를 깨우쳐주는 조력자, 즉 인간성에 깃들인 모든 악을 제거하여 인간의 정신적 건강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자이다.
젊은 시절 나는 소크라테스가 깨달은 바를 직접적으로 주장하길 바랬나 보다...
.......
??
그냥 넌 세상을 모르고 지금처럼 즐겁게만 지내라, 그냥 행복해라는 말을 어제도 들었다. 내가 그냥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깨닫고 항시 즐거운 척할까. 아니면 이대로 그냥 즐겁게 지낼까.
망설이다가 다시 또 시도한다.
소크라테스의 주장(변론)이다.
플라톤이 적은 내용이기에 각자 나름, 해석이 또 다를 것이다. 짧은 경로는 이러하다.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거기에다 한국 정서를 담은 황문수에게서, 그리고 내게로...
(2020.7.12)
(사진 출처, 플라톤, 황문수,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