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선택과 결정으로 세상이 바뀌기도 하고 세상이 정지하기도 한다.
누가 어떤 결정을 하든 세상은 솔직하게 반응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살아오던 생활 패턴(습관)대로, 생각하던 가치관대로 느끼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고난이나 고통, 충격 앞에서는 극히 주관적이다.
부재의 의미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단지 자신의 소지품을 잃어버려도 그것이 기억날 때마다 연거푸 안타까워하면서, 특히 소중한, 자신 곁에 늘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게 뭔지 아는 이는 드물다. 경험을 하였든 하지 않았든 간에, 그 자체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와 모르는 이, 둘로 나뉜다. 그 차이는 소중함을 아는 사람인가 아닌가의 차이다.
나이 드신 분들은 코로나 19를 역병이라 여긴다. 젊은이들은 그들이 즐겨 보는 재난 영화처럼 그냥 대수롭지 않은 바이러스라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의 건강을 장담하는 사람이든 염려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코로나 19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위기의 시대라 말하며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건강을 장담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2월부터 가족들에게 주장했다. 코로나 19는 결국에는 감기와 같을 거라고 말이다. 감기는 코로나 19처럼 사람들 면역력(건강상태)이나 증상에 따라 빨리 나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감기 증상이 약한 경우는 하던 일을 멈추고 쉬거나 비타민제를 먹거나 또는 상비하고 있던 감기약 한 알 정도로 거뜬히 낫는다. 하지만 감기 증상이 심한 경우는 오랜 기간 낫지 않아 생활이 마비되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는 폐렴이 되어 사망하기도 한다. 그러니 감기약이 항상 우리 곁에 있어도, 언제나 복용할 수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무용지물일 수 있다. 코로나 19 기사를 접한 개인적인 해석이다.
“어떤 일이든 그냥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기사나 글이든 글쓴이의 생각이나 의도는 물론이고, 읽는 이들 나름의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인 해석이 뒤따른다. 선명한 뉴스가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선명하지 않은 뉴스 정보를 스스로 걸러 낼 기운이 아닐 때는 당시엔 보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나를 다진 후에 다시 보자는 주의다.
뉴스가 차단된 상태에서 갑자기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사건 내용이나 관계자가 그 자체로만 보인다. 사건과 사건 당사자에 대해 일차적인 시각만 작동한다. 어떨 때는 사건은 보이지 않고 사람 자체만 보일 때도 있다. 일상을 거스르는 충격적인 사건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사건에 따라 처음엔 사건 당사자를 위로하고 싶을 때도 있고, 마땅한 대가를 치르길 바랄 때도 있다.
지금 말하는 예는 사건 당사자를 위로하고 싶을 때이다. 이런 경우에는 누군가가 말했듯이, 인간이 모두 똑같아 보인다. 사건 당사자 모두가 보통 사람으로 보인다. 사실 원초적인 부분에서 모두가 보통 사람이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뿐, 인정하지 않고 살뿐이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과 위대한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확연하다. ‘자신만 생각하느냐, 타인들까지도 생각하느냐’이다.
“고난이나 충격 앞에서 비난과 질타부터 튀어나오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악처라 알려진 크산티페가 있다. (중학생 때부터 그녀가 과연 악처였을까 항상 의문이었다.) 그녀 삶에서 남편은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비마저도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육체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고도 충족되지 않아 무척 괴롭고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남편, 소크라테스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던 거다. 비난과 질타 같은 말로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을 하소연했다.
소크라테스는 부부 생활에서는 보통 사람이었다. 아니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못한 남편이었을 수 있다. 기준이 어떠하든 그 시대 남편으로서나 이 시대 남편으로서나 보통 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현대는 여자가 경제 활동을 할 기회가 있어 수입을 책임지며 남편을 참아주거나 이해하며 함께 살 수도 있다. 아니면 이혼이라는 결정을 할 수도 있지만 그 시대는 달랐다.
그 시대에 살았던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가 수입을 등한시하고 했던 모든 활동을 이해했던 사람이었을까. 수입 없는 삶이 막막했을 텐데...
그녀가 자식들과 가정 살림을 모두 책임졌으므로 남편의 사상을 이해했으리라 살며시 추측해 본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가 가정을 위해 성실히 일해 수입을 책임질 가능성은 없었지만 자신 처지를 그냥 참고 극복하여 초월했던 사람이지 않았을까. 아마 그녀는 모든 순간은 아니었어도 어느 정도는 참고 초월했으리라 추측한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우리가 현재 소크라테스를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성인으로,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했던 사람으로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크산티페는 한 번씩 잔소리를 퍼붓고 나서 그로 인해 생겼을 다양한 감정을 스스로 조절했으리라고. 그런 후 소크라테스를 다시 지켜봐 주고, 다시 안아주며 챙기고 또한 지지하며 사랑했을리라 생각한다. 그도 아니면, 소크라테스 자신이 자신을 챙기며 지혜와 굳은 신념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크산티페를 견뎌내며 사랑했을 수도 있다.
추측에 따른 내 결론이다.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는 서로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서로 달라도 견뎌주고 이해하며, 함께 이겨내어 사랑하며 살지 않았을까.
역사에서도 현재도 알 수 없는 일, 알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참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세상일지라도 누군가의 태산 같은 고통(고민) 앞에서 비난과 질타가 먼저이고 싶진 않다. 서로 위로하며 도와주며 살고 싶다.
‘너무 욕심내지 않고 너무 바라지 않으며...’
“그저 내 소중한 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그렇게 살아도 좋지 않은가...”
(사진 출처, 플라톤, 황문수,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