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도미니꼬
로마에서만 4일 간 머물렀다.
여행 마지막 도시였고, 남는 일정을 적당히 비벼서 일정을 짤 생각이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에 생각보다 많은 날짜를 할애했다.
원래는 아씨시까지 가 볼 생각이었는데, 막판에 일정이 너무 촉박해졌다.
결국 과감하게 나머지 계획을 포기하고, 로마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덕분에 로마에서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느긋한 아내를 채근할 일도 없었고, 신경을 곤두세울 일도 없었다.
'지금 못 하면 나중에 하면 되지, 뭐'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시간이 돈보다 귀한 여행자에게는 사치였지만, 알게 뭔가.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어야지.
구글맵에서 로마를 검색하면 유적과 관광지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작정하고 구경하려 들면 1주일도 모자란 곳이다.
하지만 로마는 첫인상이 나빴던 탓일까, 사람들을 구경하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가이드북에 나온 관광지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언젠가 써먹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콜로세움, 포로로마노 등을 돌며 사진을 찍긴 했지만,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다.
우리가 택한 로마의 테마는 '성지순례'였다.
독실하다고는 말 못 하지만 신자인 우리에겐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는 몇 년 전 우리 본당에서 사목 했던 신부님이 유학 중이었다.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만났던 스페인 계단에서, 우리는 젤라토를 들고 만났다.
예쁘고 잘생긴 주연 배우는 소주가 그리운 사제와 두 달 여행에 초췌해진 중년 부부로 대체됐다.
낭만적인 스페인 계단 풍경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엑스트라들에 가려 도떼기시장으로 변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청년 사목을 담당했던 신부님은, 신자들의 일상을 함께 하기 위해 자주 술자리에 참석했다.
술을 즐기긴 했지만, 결코 잘 마시지는 않았던 신부님의 말이 재미있으면서도 안타까웠다.
얼마나 외로울까.
하지만 회포를 길게 풀 수는 없었다.
아무리 반가워도 신부님은 학기 중이었고,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은 딱 반나절, 신부님은 산타 마리아 데 포폴로 성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포폴로 광장 입구에 있는 작은 성당이다.
포폴로 광장은 기원전 220년 경 만들어진 플라미니아 가도의 시작점으로, 로마의 대문이었다.
외지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무조건 포폴로 광장을 지나야 포로 로마노에 닿을 수 있었다.
성당이 유명한 이유는 카라바조의 작품을 비롯한 미술품 때문이다.
성당 안에는 카라바조의 <십자가에 못 박힌 성 베드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이 전시돼 있으며, 안니발레 카라치의 <성모승천>, 베르니니의 조각상 <하바쿡과 천사>, <다니엘과 사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게 성당인지 미술관인지 헷갈린다.
백미는 역시 카라바조의 작품이다.
위의 사진이 바로 그거다.
그림은 챔버에 따로 걸려 있는데 평소에는 조명이 꺼져있다.
카라바조의 작품은 안 그래도 로우 키에 명암 대비가 강한 작품인데, 조명까지 없으니 제대로 보일 턱이 없다.
챔버 앞에 있는 동전 투입구에 1유로 동전 넣으며 조명이 20초간 켜진다.
기가 막혔다.
작품에 강한 조명이 닿으면 손상될 위험이 있는 건 이해하는데, 그럴 거면 적당한 조도를 찾아야 할 게 아닌가.
1유로짜리 플래시가 수시로 터지면 오히려 작품이 더 훼손될 것 같다는 건 기우였을까?
투덜거리는 나를 보며 신부님은 씩 웃으며 교회의 건축 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챔버(Chamber)'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럽에서 성당을 돌아다녀 보면 희한한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성전에 제대가 뻔히 있는데 성전 옆면을 따라 작은 제대나 조각, 그림, 동상이 있는 작은 방이 늘어서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는 세상으로 뛰어들었지만, 불과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는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
미사는 사제의 특권이었고, 신도들은 사제의 미사에 편승했다.
제대는 신자가 아닌 성전 벽, 감실을 향했고 신자들은 사제의 등을 보며 미사를 드렸다.
세속 권력까지 손에 넣은 교회는 경쟁하듯 거대한 성전을 지어댔고, 베드로 대성당으로 정점을 찍었다.
중세 교회에서 주교 정도 위치에 있는 성직자는 한 지역의 영주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주교 영주'가 존재했다.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봤던 마리엔베르크 요새가 원래 주교 영주의 궁전이었다.
권력자들은 지위와 재산을 이용해 성전 안에 자신만을 위한 경당(챔버)를 만들거나, 아예 성전을 새로 세웠다.
그 결과 지금처럼 성전 안에 성전이 또 있는 기묘한 형태가 탄생했다.
종교개혁 이전 비뚤어진 신심의 단면이다.
경쟁하듯 재물을 퍼부은 결과 교회 미술은 놀라운 발전을 이뤘겠지만, 결국은 평민과 농노의 고혈을 짜낸 재물이었을 터다.
과연 종교개혁이 일어날 만했다는 생각이 들도록 호화롭기 짝이 없다.
그 시절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문득 옆에 있는 도미니꼬 신부님에게 눈길이 돌아갔다.
유학과 교수 사제는 생각도 않고 있던 도미니꼬 신부님은, '가서 공부하고 오라'는 교구의 명을 따라야 했다.
타지에서 만난 반가움은 잠시, 안 그래도 외로운 사제의 삶에 외로움이 가중된 유학생활 중인 신부님 얼굴은 초췌했다.
하지만 사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순명이라고 했던가, 신부님의 웃음은 무거웠다.
간혹 세속화된 사제를 만나게 된다.
특히 학교, 기관 등에 속해 직책이나 직함을 달게 되는 사제는 성직자가 아닌 회사 상사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그분들의 신심과 소명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들의 내면은 알 수 없는, 그들의 언행 만으로 판단해야 하는 신자 입장에서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짜 가톨릭 사제의 삶은 가시밭길이다.
10년에 가까운 신학교 생활을 마무리하고 사제로 서품을 받을 때, 사제들은 온몸을 바닥에 던지는 퍼포먼스를 한다.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해,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겠다는 맹세다.
그렇게 가톨릭 사제는 인간의 본능을 모조리 찍어 누르고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바쳐 신앙을 증거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했듯, 자기 몸을 내던져 신자들에게 신앙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찰하고, 단련해야 한다.
사람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모순과 한계를 인정하고 끝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한다.
말로 표현하고, 글로 쓰는 건 쉬워도 그렇게 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런 사제를 만나게 되면 절로 경건해지고,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실제로 그런 사제가 많다.
도미니꼬 신부님은 그 길을 가는 중이었다.
초췌한 얼굴은 신부님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본성을 누르고 순명하는 자세는 성직자의 모습이었다.
그 모순을 괴로워하며 견디고 있는 것이 사제 도미니꼬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라고 절규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고 표현하면, 아마도 신부님은 펄쩍 뛸 터다.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신부님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부평초처럼 떠돌아야 하는 사제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