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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

...은 피곤하다

by 집사 김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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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었고, 로마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테마는 '제국'이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시작해 포로로마노, 콜로세움을 훑는 역사 투어였다.

여전히 고장 난 수도에 분노하며 외출 준비를 마쳤다.

슬럼가처럼 보였던 테르미니역 뒷골목은 적응을 한 듯해도 역시 슬럼가처럼 보였다.

숙소를 나설 때마다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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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티노 언덕 근처 지하철 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갔다.

앞서 가는 아내 뒷모습을 한 장 찍었는데, 계단 위에 있던 군인이 우리를 불러 세웠다.


"방금 찍은 사진 보여 주시오"


찍을 때는 몰랐는데, 사진 구석에 군인이 들어와 있었다.


"당신 찍은 게 아니라 아내 찍은 거요"


사진을 살펴본 군인은 마뜩잖은 듯 구시렁거리더니 다음부터는 조심하라며 카메라를 돌려줬다.

세계적으로 테러리즘이 횡행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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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티노 언덕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까무잡잡한 검투사가 짝다리를 짚고 서있었다.

우리가 지나가자 검투사는 갑자기 아내의 팔짱을 끼더니 나를 향해 '헤이~ 픽쳐~ 픽쳐~'라며 사진 찍는 포즈를 취했다.
잠이 덜 깬 탓인지 아내는 반사적으로 '브이'를 그렸다.

그걸 본 나는 정신이 나갔던 것인지 그대로 셔터를 눌러버렸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검투사는 아내에게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라라며 한참 까불었다.

그러다니 아니나 다를까, 손을 내밀고 돈을 요구했다.
그때서야 잠이 깼다.


"그래서, 얼만데?"


"5유로!"

"야, 나 지금 잔돈이 없어, 20유로짜리 밖에 없다. 거슬러줘"


"나도 잔돈 없어. 그냥 20유로 줘"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난 프로페셔널 모델이야. 난 그 돈 받을 자격 있어"


뒤통수에서 '빠직'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곤한 하루가 되겠구나' 생각하며 전투모드에 들어가려는데, 녀석과 똑같이 생긴 검투사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팔랑크스(방진 方陣)를 짜서 게르만족을 향해 전진하는 중장보병인양 몰려드는 검투사들을 보니, 자칫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년 병장 시절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랬다.

귀국이 며칠 안 남은 상황이었다.


"옛다. 먹고 떨어져라"


사진 몇 장, 그것도 내 카메라로 찍고 3만 원 가까운 돈이 날아갔다.

2013년에 잡지에 '스캠시티'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로마 시내에서 기념촬영 후 금품을 요구하는 수법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내가 자료 조사해서 기사를 써놓고, 내가 그대로 당했다.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밀어닥쳤다.

여행 중에 겪는 수많은 실패, 고생의 경험은 나중에 안주거리가 되기 마련이다.

이번 안주거리는 내내 쓴맛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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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과 판테온을 둘러본 후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베네치아 광장으로 걸어갔다.

베네치아 광장은 로마 시내 교통의 요지다.
서울로 치면 서울역 환승센터 같은 곳.
안내판에 적힌 버스 노선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도착 예정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은 무용지물이었다.

교통 체증은 언제 풀릴지 알 수 없었고, 나는 왜 내가 기다리는 버스 빼고 다른 버스들만 오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광판에는 '10분 후 도착'이라고 떴지만, 30분째 똑같이 '10분 후 도착'이었다.

한 시간가량 기다리다가 결국 버스를 포기하고 지하철을 탔다.
'방음'이라는 개념 따위는 국 끓여 먹은 듯한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파김치가 됐다.


그렇게 집에 가는 날 아침이 밝았다.

지난밤 '드디어' 고장 난 수도를 고치러 기사가 찾아온 덕분에 개운하게 샤워를 마쳤다.
캐리어에 짐을 쓸어 담는 기분이 묘했다.
젊지 않은 나이에 둘 다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 털어 훌쩍 떠난 여행이었다.

뭔가 대단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니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서 편안한 내 침대에 파묻혀 이틀 정도 숙면을 취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로마가 사람 기운 빠지게 만드는 도시였던 건지, 아니면 집에 돌아갈 시기가 되니 조급증이 생긴 건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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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전자였던 것 같다.

공항버스 정류장에 일찌감치 도착해 표를 끊었는데, 버스는 도착 예정시간이 지나도 올 기미가 안 보였다.

그 사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갔다.

버스는 30분 늦게 도착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탑승구로 내달렸다.
2003년 베이징 역에서 중국인들과 어깨싸움을 하며 매표소로 달리던 그날이 떠올랐다.
점잖은 신사 한 명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 난장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매표원은 스마트폰을 붙들고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악전고투 끝에 오른 버스에는 다행히 자리가 남아 있었다.
여행을 마치며 남긴 아내의 마지막 한마디가 잊히지가 않는다.



"로마에서 휴일을 보내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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