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버프레임과 파크베어크 하우스
아우토반을 타고 달려 닿은 곳은 알스펠트다.
<빨간 모자> 혹은 <빨간 망토>라 부르는 동화와 관련된 도시다.
빨간 망토를 입은 주인공 소녀가 할머니에게 심부름을 가다가 늑대를 만나 위기를 맞고, 사냥꾼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할머니와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이다.
사실 도시 자체가 동화 내용의 배경이 된 것은 아니고, 동화 속 빨간 모자 차림새가 이 지역 전통 의상이다.
원래 결혼 적령기 처녀는 녹색 모자를, 기혼 여성은 보라색 모자를 썼다고 하는데, 이 전통이 변주되어 빨간 망토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에는 오류가 있다.
원래 <빨간 모자> 이야기는 그림형제 이전에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가 정리한 판본이 있다.
즉, 이야기 자체는 이미 유럽 지역 민담으로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온 것이고, 그림형제는 다양한 판본을 조합하고 정리해서 <그림동화>에 수록한 것이니, 이 지역과 동화의 연결 고리를 찾는 건 어쩐지 무리수라는 생각이 든다.
동화 얘기는 접어두고 보면 동네 자체는 매우 아름답다.
삐뚤빼뚤한 나무 프레임이 인상적인 중세 독일 전통 가옥들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마르크트 광장 중심 시청사 건물은 특히 인상적이다.
1512년에 지었는데 모양이 가분수 형태라 꽤 독특하다.
독일 기념품 중에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피겨의 원본이기도 하다.
독일 소도시 목조건물 프레임은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도록 예쁘다.
두꺼운 목재 골조가 건물 외벽에 드러나 일정한 패턴을 만들고, 조금씩 패턴이 다른 가옥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에서 리듬감이 느껴진다.
이런 목조 가옥 형태는 영화나 동화 속 주택 모델로 자주 등장한다.
<미녀와 야수>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오는 집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그런데 독일 전통 가옥을 보다 보면 '설계 같은 거 안 하고 그냥 막 지었나?'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독일 목조 가옥은 위로 올라갈수록 앞으로 툭 튀어나온 짱구 같은 모습이다.
보고 있으면 불안감이 느껴지는 구조인데 이게 또 묘한 긴장감이 있다.
보는 재미가 있다.
나중에 귀국해서 사진을 정리하다가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검색해보니 바로 뜬 키워드가 '팀버프레임 Timberframe'이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두꺼운 나무로 뼈대를 만든 집'이다.
쇠못이 부족했던 산업혁명 이전까지 주요 건축 기법으로, 규격이 8인치*8인치 이상인 두꺼운 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에 '중목구조'라고도 부른다.
(*정확히는 중목구조라는 카테고리 안에 팀버프레임이 들어가는 듯한데, 이 글은 건축에 관한 논문이 아니므로 대충 넘어가자)
못을 거의 안 쓰기 때문에 건물 뼈대가 되는 중목 이음새를 정교하게 재단해 짜 맞추거나 나무못을 끼워 넣고 고정해 건물을 올린다.
크게 보면 한옥도 중목구조 건축물로 볼 수 있다.
이런 중목구조 건축 양식은 비단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건물을 지을 석재가 부족했던, 그러나 상대적으로 목재가 풍부했던 중세 유럽의 지리적 특성과도 관계가 있다.
프레임 외부를 외장재로 감싸지 않고 골조 사이를 흙이나 벽돌로 채워 넣어 건물을 마감해 자재를 아꼈다.
중목 프레임 자체가 훌륭한 인테리어, 혹은 익스테리어 효과를 내니 나름 일거양득인 셈이다.
같은 기술이라도 사람에 따라, 지역에 따라, 유행에 따라 다른 스타일을 만들기 마련이다.
독일 중목구조 가옥은 파흐베어크하우스(Fachwerkhaus)라고 부른다.
꼼꼼하고 철저한 독일인의 기질이 느껴지는, 꽉 짜인 목조 골재 패턴이 골목 끝까지 이어진 마을을 돌아다녀 보면 '이게 독일이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간혹 2층이 1층보다 넓고, 3층이 2층보다 넓은 희한한 건물도 볼 수 있는데, 이건 과거 독일 조세법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건물이 토지를 점유한 면적만큼 세금을 물렸기 때문에 세금을 아끼기 위해 1층보다 2층을 넓게 짓는 방식으로 실내 공간을 늘린 건데, 층을 올릴 때 기초가 되는 바닥 목재 골조를 아래층 보다 조금 넓게 잡는 방식으로 공간을 확보했다.
파흐베어크 하우스는 메르헨가도 이후 로만티크가도를 따라가는 동안 질리도록 보게 된다.
메르헨가도 여정의 마지막은 슈타이나우다.
하나우에서 태어난 그림형제는 아버지 직장 문제로 슈타이나우로 이사했다.
형제는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슈타이나우에는 그림형제 생가가 남아있으며, 지금은 그림형제 기념관으로 사용 중이다.
메르헨가도 답사를 한다면 모를까, 관광이 목적이라면 슈타이나우 자체는 크게 볼거리가 없다.
하지만 '언젠가 동화를 쓸 거야'라며 이번 일정을 계획안 아내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출발하기 전에 그림형제 관련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책 한 권을 읽었는데, 그 안에는 슈타이나우의 생가 스케치도 있었다.
실제로 건물을 보니 책 속 삽화가 현실로 튀어나온 듯했다.
직접 보고 나니 신기하기도 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반가움 같은 게 느껴졌다.
신이 난 아내는 사방을 헤집고 다녔다.
기념관에는 그림동화의 내용을 구현한 조형물이 상당히 많았는데, 아내는 그 모든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어주고, 보여주고, 확인 후 지우고, 다시 찍어주고, 보여주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타이밍에 통풍 증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림형제 기념관에서 100미터 정도만 걸어 나오면 마르크트 광장이 나타난다.
구 시청사, 개구리왕자 분수, 슈타이나우 성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분수대 앞에 이르자 오한이 들었다.
아내는 역시나 혼자서는 가지 않으려 들었다.
아내는 못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연애 기간이 짧았다.
둘 다 소위 말하는 결혼적령기를 지나 만났기 때문에 서두른 감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서로의 성격, 성향, 행동양식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아내는 긍정적이고 온화한 사람이었던지라 싸울 일이 없었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가 함께 저녁을 먹으며 하루 일과를 나누고 잠자리에 드는,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그렇게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5년 간, 우리는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24시간 내내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니 상상도 못 했던 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치약을 가운데부터 짜서 쓰는 습관 등은 차이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양치할 때마다 신경이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음식을 먹을 때면 식기류가 제짝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비슷한 모양과 색깔을 맞추고 싶어 하는 성향은,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여행의 낭만을 찾고 싶은 욕구는 이해하지만, 여행과 생활 사이 어딘가에서 지내는 장기여행에서는 이런 습관 차이가 꽤 큰 스트레스가 됐다.
가장 큰 문제는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아내는 도무지 혼자서 무언가를 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느새부터 나는 아내의 보호자, 아니, 보모가 된 기분이었다.
일정을 논의하면 아내는 항상 '난 상관없어'라는 뉘앙스의 답을 했다.
식당에서, 마트에서, 여행지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내는 내 뒤로 숨었다.
난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내가 여행지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경험을 쌓았으면 했다.
하지만 아내는 절대로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슈타이나우 성 앞에서 느꼈던 피로는 이런 순간들이 쌓여서 표출된 감정의 이면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난 그때 짜증을 냈던 것 같다.
나는 혼자 다녀도 아무렇지 않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지만, 아내는 함께하는 걸 원하는 사람이었다.
혼자 다니는 아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내가 아내를 초라하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성 안으로 들어서는 아내의 풀 죽은 뒷모습을 보며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수동적인 아내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
스트레스를 받으니 통풍 증상이 심해졌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분수대 앞에서 메르헨가도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