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의 길, 로만티크 가도
독일 중부 뷔르츠부르크에서 최남단 퓌센까지 이어지는 350km 구간이다.
고대 로마인이 갈리아(지금의 독일, 프랑스) 지역 원정 때 지난 길에서 유래했으며, '로마인의 길'이란 뜻으로 '로만티크 가도'라고 불렀다.
로만티크 가도는 1900년대 초부터 관광지로 개발됐다.
길을 따라 펼쳐진 풍경과 중간에 만나게 되는 도시들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그래서 중의적인 의미로 '로맨틱 가도'라고도 부른다.
로맨틱 가도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동차를 타고 느긋하게 이동하면서 소도시를 둘러보는 거다.
차선책은 로맨틱가도를 왕복하는 '로맨틱 가도 버스(Romantische Strasse Coach)'다.
하책은 철도와 버스 등 대중교통 노선을 조합해 여행하는 건데, 중간에 끊어진 구간도 있고 시간 낭비가 심해 추천하기 어렵다.
로맨틱 가도 티켓 예약은 온라인으로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약 프로그램 설치 과정에서 계속 오류가 떴다.
Active-X가 유럽에서까지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하루 저녁을 화가 잔뜩 난 상태로 보낸 후, 다음날 아침 버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이토록 허술한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게 미심쩍었지만, 여기는 믿음과 신뢰의 나라 독일이다.
아침 일찍 체크아웃하고 역으로 가니 과연 로맨틱가도 버스 정류장이 있다.
버스는 정시에 도착했고, 기사는 현장에서 종이 쪼가리에 내 이름을 적어 티켓이랍시고 내어 줬다.
버스 안에는 로맨틱 가도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들어찬 안내 책자가 굴러다녔다.
굴러다녔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안내 책자가 버스 바닥과 좌석에 굴러다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독일이라고 모든 시스템이 정교하게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우리가 탄 버스 기사는 그날이 근무 첫날이었다.
그래서인지 뷔르츠부르크 중앙역에서 레지덴츠까지 가는 짧은 구간에서 두 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다.
버스표를 끊을 때도 편도 운임이 아니라 왕복 운임을 보고 있길래 정정해 줬더니 "오늘이 첫날이에요, 죄송합니다"라며 멋쩍게 웃었다.
뷔르츠부르크를 벗어나자 다시 광활한 평야가 펼쳐졌다.
지평선 끝자락에 개미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머리 위로 먹구름이 일렁거렸다.
푸른 잔디 위에는 노란색 들꽃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마치 금가루를 뿌린 듯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아내는 어느새 잠들었다.
등만 닿으면 어디서건 잠이 든다.
대단한 능력이다.
첫 번째 경유지는 바이커스하임(weikersheim)이다.
'르네상스 양식 작은 궁전이 있는 마을'이라고 책자에 소개돼 있다.
특이하게 궁전터가 삼각형이다.
달랑 20분을 정차하는데 그 와중에 궁전 투어에 참가할 사람을 따로 모집한다.
궁전 관리인, 혹은 가이드가 버스 정류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사람들이 내리면 원하는 사람을 모아서 데려간다.
투어 비용은 6.6유로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20분 안에는 수박 겉 핥기밖에 안 될 듯해서 불참하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10분 정도 걸으니 구석구석 다 돌아볼 수 있었다.
투어는 20분 만에 끝났고, 다녀온 다른 승객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바이커스하임을 떠나 뢰팅겐을 지났다.
독일 소도시들은 중세 도시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교회, 시청사 등 주요 건물이 위치한 마르크트 광장에서 사방으로 골목이 뻗어나가며 주택이 들어선다.
어느 도시를 가도 구조는 똑같다.
또한 구 시가지는 보통 도시 중심에 위치한다.
즉, 구 시가지를 중심으로 신도시가 확장해 나간 형태다.
서울 역시 사대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도시가 확장해 나간 형태임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아마도 독일 소도시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등장할 곳이다.
이름이 워낙 길기에 보통 '로텐부르크'로 줄여서 부른다.
안내 책자에는 '독일에서도 인기 순위 1, 2위를 다투는 관광지, 도보로 15분이면 성벽 끝에서 끝까지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작다'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작다는 건 현대 도시에 비해 작다는 거고, 독일에 널린 '소도시'를 기준으로 보면 로텐부르크는 상당히 큰 축에 속한다.
최소한 메르헨 가도와 로맨틱 가도를 다니면서 로텐부르크보다 큰 소도시는 본 적이 없다.
마르크트 광장에 자로 잰 듯 줄을 맞춰 선 건물의 파사드 사이로는 아기자기한 파흐베르크 하우스(독일 목조주택)가 늘어선 골목이 얼기설기 얽혀있다.
골목 끝에서 만나게 되는 중세 건물은 살짝 날라버렸지만 포근한 색으로 골목 장식을 마무리한다.
로텐부르크는 17세기 30년 전쟁 때 도시가 박살날 뻔했었다.
점령군의 포화가 들이칠 위기의 순간, 동네 소년 하나가 점령군 사령관에게 지역 명물인 프랑켄 와인(*프랑켄은 독일 중부와 남부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이다. 포도가 특산물이며 독일을 대표하는 와인 생산지다)을 권했다.
와인 맛에 반한 사령관이 "누구든 이 와인을 큰 잔(나무위키에는 3.2리터짜리라고 써놨더라)에 따라 한번에 다 마시면 이곳을 파괴하지 않겠다"라고 선포한다.
그러자 당시 로텐부르크 시장이던 '누쉬(Nusch)'가 나서서 용감하게 잔을 들이켜 도시를 구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좌우간 요점은 로텐부르크는 중세 모습을 잘 간직한 채 살아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세계대전 때도 관광상품으로써 도시의 중요성을 간파한 나치의 배려(?) 덕분에 포화를 비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구 시가지의 아름다움은 독일 어느 소도시보다 뛰어나다고 알려진 곳이다.
로맨틱 가도 버스 티켓은 유효 기간이 2일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원하는 사람은 기점인 뷔르츠부르크에서 종점인 퓌센까지 하루 만에 갈 수도 있지만, 중간 지점인 로텐부르크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정오에 오는 버스를 잡아타고 종점까지 갈 수도 있다는 소리다.
로텐부르크가 그만큼 볼 만한 도시라는 방증이다.
우리 역시 이곳에서 하루 묵어갈 계획을 세운 터였다.
숙소로 가는 길은 대단히 고됐다.
독일 뿐 아니라 이후 방문한 유럽 소도시는 대부분 울퉁불퉁한 돌덩이를 깔아 놓은 인도를 걸어야 했다.
캐리어 바퀴가 부서질 듯 덜거덕거렸고, 수시로 진행방향에서 벗어나 튀어 올랐다.
파김치가 돼서 찾은 숙소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예약한 방은 4층이었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폭탄 같은 캐리어를 어깨에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다가 문득 '이걸 그냥 창밖으로 던져버리면 어떨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헉헉대다가 뒤를 돌아보니 숙소 주인은 아내의 캐리어를 들고 아내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이탈리아계 독일인이라는 숙소 주인은 여성에게는 매우 친절했고, 남성에게는 매우 사무적이었다.
짐을 풀고 로텐부르크 구 시가지를 둘러보러 나섰다.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담하고 예쁘다던 구 시가지는 내 기준에는 너무 크고 번잡스러웠다.
골목 구석구석을 메운 인파와 시끄러운 사람들 목소리가 정신을 사납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날이 점점 궂어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들어간 카페는 우연찮게도 슈니블(Schneeball)을 파는 곳이었다.
슈니블은 몇 년 전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인기를 끌었다.
로텐부르크 지역 전통 과자로, '눈덩이'라는 뜻을 가진 과자다.
'망치로 깨서 먹는 과자'로 소개됐는데, 막상 먹어보니 그 정도는 아니고 손으로 뜯어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설탕 가루를 입혀놔서 굉장히 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달았다.
커피와 궁합이 꽤 괜찮았다.
우리 말로는 '슈네발', 혹은 복수형으로 '슈네발렌'이라고 표기하는 듯하다.
하지만 현지에서 들을 때는 '슈니블'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과자의 이름을 물었더니 친절한 카페 안주인은 '슈니플뢱첸'이라며, 내 발음이 비슷해질 때까지 끈질기게 교정 해줬다.
차를 마시면서 아내와 대화를 나눴다.
아내는 인스부르크 일정을 포기했다.
원래 아내가 꼭 가보고 싶다던 곳이지만, 일정과 교통편 등을 고려해 난 진작에 포기했던 지역이었다.
내심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아내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다.
여행이 보름째를 넘어가면서 슬슬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우리 둘 모두 조금씩 욕심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아무 기대 않고 갔던 하멜른은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았고, 기대를 했던 다른 지역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마음속에 빈 공간이 있어야 여행지에서 느낀 감상과 경험을 채워 돌아갈 텐데, 그간 너무 많은 걸 담고 다녔던 것 같다.
조금씩 양보하고 나니 응어리가 풀리고, 말문이 터졌다.
아내는 함께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좋다 했다.
반면 나는 순탄한 여행을 위해 효율성을 우선순위에 뒀다.
그러다 보니 협업보다는 분업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
아내는 길을 헤매더라도 그 과정을 함께 겪는 것이 여행의 일부라 했다.
"혼자 길을 잃었을 때는 두렵지만, 함께 길을 잃었을 때는 걱정이 안 된다"라고 했다.
나는 반대였다.
혼자 길을 잃으면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고 원래 궤도로 돌아갈 수 있지만, 함께 길을 잃으면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밀려들었다.
이 차이가 그간 여행에서 불화의 원인이 됐다는 걸, 이날 아내와 대화하면서 인지했다.
곱씹어 보면 아내 생각이 옳다.
나름 합리성을 추구한다고 했던 행동이 아내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길을 찾는 방법도, 움직이는 속도도 아내와 나는 서로 다르다.
표현하는 방법도 다르다.
직설적인 나와 다르게 아내는 자기 의견을 에둘러서 질문으로 표현한다.
선택권이 나에게 넘어오지만 사실 아내는 이미 답을 정해놓은 상태다.
이를 인지하지 못했던 여행 초기에는 짜증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결국 몇 번인가 싸늘한 분위기를 경험한 후에 '원하는 게 있으면 직설적으로 얘기해라. 안 그러면 죽을 때까지 못 알아듣는다'라고 요구했다.
아내는 그게 힘든 모양이다.
그래도 여행하는 동안 조금씩 바뀌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 입을 통해 이 차이를 듣고 나니 미안했다.
그래서 나도 천천히 바꿔보겠다고, 노력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사람은 한순간에 변하지 않는다.
40여 년을 쌓아온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단번에 바뀔 수는 없다.
이 여행은 이때부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과 학습의 시간으로 의미를 갖게 됐다.
다음날 아침, 고요한 도시 모습이 궁금해 일찍 일어났다.
로맨틱 가도 버스는 정오에 로텐부르크에 도착한다.
즉, 오전 시간은 그대로 자유시간이다.
아내는 느긋하게 침대에서 헤엄치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고, 난 혼자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다.
로텐부르크 구 시가지 관광 마차는 이른 시간부터 영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부는 사료 주머니를 재갈에 걸었다.
순한 눈알을 굴리며 식사를 하던 갈색 말은 투레질을 하더니 털을 골라주는 마부에게 뺨을 비볐다.
서늘한 빗방울이 마부의 가죽 재킷 어깨 위에서 가늘게 튀어 올랐다.
쌀쌀한 아침, 말도 사람도 허연 입김을 내뿜고 있었지만 공기는 따뜻했다.
버스는 정시에 도착했다.
이번 운전기사는 경력이 꽤 되는 듯했다.
여유 있게 농담을 던지는 모습에서 '짬'이 느껴졌다.
버스에 올라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창 밖 풍경을 수채화로 바꿔놨다.
일기예보는 독일 남부 지역 전체에 비 소식을 전했다.
버스는 어제처럼 곡예를 하듯 로텐부르크의 좁은 골목길을 지났다.
구 시가지 골목은 대책 없이 좁다.
때로는 버스 창문 바로 앞에 골목가의 주택 2층 창문이 맞닿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지금 기준에서 좁다는 거고 옛날에는 아니었을 거다.
버스는 그 좁은 골목들을 헤집으며 구 시가지를 관통했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빗줄기가 거세졌다.
스콜인 양 퍼붓다가 그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잔뜩 찌푸린 하늘은 도무지 갤 생각이 없는 듯했다.
로텐부르크를 떠나 닿은 곳은 딩켈스뷜 Dinkelsbühl이다.
잘 보존된 중세시대 목조 가옥이 즐비한 동네로, '동화 같은 마을'을 상상하고 찾아간다면 로텐부르크보다 딩켈스뷜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주요 관광 포인트는 '성 게오르크 교회'다.
버스도 교회 근처에 정차했다.
성전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천장을 뚫고 나갈 듯한 열주와 공간감에 압도당했다.
성 게오르크 성당은 1400년대에 지어진 고딕 양식 성당이다.
실내 장식은 거의 없고 칙칙한 회색 열주만이 시야를 채운다.
앞서 말했듯이 천장 높이가 어마어마하다.
이는 고딕 양식 특징으로 르네상스 이전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신을 중심으로 행해지던 시기, 신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고 인간의 자의식을 낮추기 위한 의도적 설계다.
바이커스하임에서는 30분 정차가 딱히 아쉽지 않았는데, 딩켈스뷜은 아니었다.
교회 돌아보는 데만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버스 정류장과 교회를 오가는 동안 언뜻 봤던 구 시가지가 계속 눈에 밟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버스는 역시나 정시 출발했고, 빗줄기는 계속 굵어졌다.
딩켈스뷜 다음은 뇌르틀링겐 Nördlingen이었다.
여기에도 성 게오르크 교회가 있었는데, 딩켈스뷜 교회와 대단히 유사했다.
알고 보니 설계한 건축가가 같은 인물이었다.
뇌르틀링겐은 덕후들의 성지다.
이유는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성채 도시의 모티프가 바로 뇌르틀링겐 성벽이기 때문이다.
옛날 먼 옛날, 아주 먼 옛날도 훨씬 이전인 태고적에 지름 1.2km 정도 되는 운석이 이곳에 떨어졌다.
그 결과 생성된 것이 '리스 분지'인데, 뇌르틀링겐은 리스 분지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다.
운석이 빚은 둥근 터를 따라 세운 중세시대 성벽은 거의 완벽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 전체에서 중세 성벽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로 관광지로서의 가치에 더해 역사적인 가치도 대단히 높은 곳이다.
뇌르틀링겐시는 이를 관광자원으로 십분 활용한다.
여행객이 직접 성벽에 올라가 볼 수도 있고, 시간에 맞춰 파수꾼이 성벽 위에서 뿔피리를 부는 퍼포먼스도 진행한다.
그러나 로맨틱 가도 버스를 탔을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정차 시간이 달랑 30분이고, 구 시가지 중심까지 진입하려면 10분 이상 걸어야 했다.
여기도 역시 성 게오르크 교회 근처에 버스를 내려주는데, 이건 그냥 교회만 보고 나오라는 얘기다.
설상가상으로 버스가 뇌르틀링겐 정류장에 서자마자 미친 듯이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펼 엄두도 안 날 정도였다.
뇌르틀링겐을 벗어나자 약 올리듯 비가 멎더니, 얼마 못 가 다시 퍼붓기 시작했다.
버스가 아우토반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로변에 끌려 나와 있는 BMW가 한 대 보였다.
빗길을 굴렀는지 박살난 상태였다.
운전자는 보이지 않고 경찰차와 구급차, 소방차가 경광등을 어지럽게 비추고 있었다.
아우토반이고 나발이고 빗길 운전은 어디나 위험하다.
한 시간 남짓 신나게 달린 버스는 어느 작은 마을에 잠시 정차했다.
그러나 승객은 여전히 우리 내외 둘 뿐이었다.
다시 지루한 여정이 이어졌다.
빗물에 덮인 창 밖 풍경은 흐릿했다.
잘 닦인 도로 덕분인지 버스는 부드럽게 달렸고, 솔솔 잠이 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평야지대가 끝나고 갑자기 침엽수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지를 달린 것 같은데 그 사이 완만하게 고도를 높인 듯했다.
그리고 숲이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차창을 때리던 빗줄기가 거짓말처럼 눈발로 바뀌었다.
눈앞에서 빗줄기가 순식간에 눈으로 변하는 모습은 마치 마법 같았다.
하얀 눈은 감탄할 새도 없이 폭설로 바뀌었다.
세상은 순식간에 순백으로 변했다.
눈 덮인 창 밖 풍경은 그대로 그림이었다.
4월 중순에 눈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아무래도 알프스를 너무 얕본 모양이었다.
신기함에 입을 딱 벌리고 창 밖을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차가 섰다.
퓌센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포인트인 슈타인가덴이다.
부들부들 떨며 버스에서 내리니,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성당 한 채가 덩그러니 서있다.
바이스키르케 Weiskirche였다.
휘날리는 눈발이 주변 풍경을 모조리 지워버린 가운데, 홀로 시선을 독차지한 성당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원래대로면 바이스키르케에 들어가 볼 수도 있지만 폭설로 길이 사라졌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길을 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지만 이 풍경만 눈에 담고 버스에 올랐다.
※ 바이스키르케 Weiskirche
1738년 6월 14일, 동네 농가 아이였던 마리아 로리가 성전의 십자고상이 눈물을 흘리는 기적을 본 후 전 세계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성지가 됐다. 보기 드문 로코코양식 성당으로 성전 내부 장식이 대단히 아름답다고 한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당이다.
퓌센에 거의 다다를 무렵, 폭설을 뚫고 차도를 따라 힘겹게 걷는 여자가 보였다.
시간은 저녁 8시, 어느새 날은 어둑해졌다.
대중교통이 끊어진 탓인지 여자는 거친 눈발을 그대로 맞아가며 걷고 있었다.
이를 본 버스 기사는 문득 차를 세우고 행선지를 묻더니 타라고 했다.
돈은 물론 받지 않았다.
퓌센에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여자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버스에서 내렸다.
기사는 싱긋 웃더니 휘파람을 불며 핸들을 감았다.
독일 시골에서 사람 냄새를 자주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