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텔스바흐 로열 패밀리
로맨틱가도의 종점이자 독일에서 알아주는 휴양도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흔히 '디즈니성'이라 불리는 '노이슈반타인성'을 가기 위한 관문으로 인식한다.
시내는 물론 외곽에도 호수가 여럿 있어, 알프스 산맥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기차역이 있는 시내 중심가는 아름다운 쇼핑몰, 카페 등이 줄지어 들어섰고, 고층건물이 없어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곳이다.
버스는 저녁 8시가 넘어 퓌센역에 도착했다.
대중교통은 열악했고, 구글맵으로도 숙소까지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거리상으로는 1.5km에 불과했지만, 가로등도 드문 시골길, 그것도 초행길을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비는 10유로였다.
당시 물가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택시비보다 3~4배 정도 비쌌던 것 같다.
힘들게 찾아간 숙소는 깔끔했지만 추웠다.
알프스의 4월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밤 사이 계속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낯설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일기예보를 보니 새벽녘에는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졌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4월 중순이었다.
예상치 못한 추위에 가지고 간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길을 나섰다.
집집마다 넓은 마당이 있고, 담장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를 봐도 여유가 넘치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날씨는 사나웠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었다.
길을 나선 지 10분 만에 손가락이 얼기 시작했다.
하얀 눈에 뒤덮인 개나리를 보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안심하고 피어났을 개나리는 난데없는 폭설에 얼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점점 따뜻해지는 바람을 만끽하며 흘러왔는데, 갑자기 엄동설한이 찾아왔다.
콧물이 줄줄 흘렀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날씨에 몸살 기운이 찾아왔다.
추위를 못 참는 아내는 진저리를 쳤다.
남들처럼 우리의 행선지도 노이슈반슈타인 성이었다.
성으로 가려면 우선 퓌센 역으로 가서 셔틀버스를 찾아야 했다.
숙소 주인이 알려준 대로 따라가 퓌센 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시골이라 그런지 배차간격이 제법 길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보니 반대 방향이다.
기사가 낭패스러운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한 정거장 정도는 그냥 데려다준다는 말이다.
멍청해진 표정으로 버스 안을 둘러보니,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바이에른 남부 지역에 들어서서 경험한 시골 인심은 매 순간이 환상적이었다.
무뚝뚝하고 냉정한 스테레오타입 독일인은, 적어도 이 지역에는 없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쾌활했고 여유가 넘쳤다.
낯선 땅에서 긴장한 이방인은 마음을 풀었다.
그래서일까?
여행을 마친 후에도 독일은 내게 최고의 여행지로 남았다.
퓌센 역에 도착하니 때마침 잘츠부르크에서 출발한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차에서는 노이슈반슈타인성으로 갈 게 분명해 보이는 관광객들이 무리 지어 내렸다.
이들은 모두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몰려들었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순서를 기다렸다.
노이슈반슈타인성 입구에서 내리니 아수라장이다.
기념품 가게는 물론 면세점까지 있었는데, 심지어 중국인 전용 면세점도 있었다.
매장 안은 쇼핑백을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직원 절반은 중국인이었다.
심지어 알리페이도 통했다.
차이나머니가 세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티켓 판매소 근처에는 호엔슈방가우성 Schloß Hohenschwangau이 있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을 건설한 루드비히 2세의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폐성을 사들여 증축한 성이다.
루드비히 2세는 이 성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노이슈반슈타인성 건설에 대한 꿈을 키웠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바이에른의 왕, 암군의 스테레오타입인 루드비히 2세 필생의 사업었다.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 <탄호이저> 등 바그너 오페라에 심취했던 루드비히 2세는 극의 무대였던 중세 성을 현실로 재현하려는 욕망을 가졌고, 실천으로 옮겼다.
그 결과물이 바로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성이다.
그러나 루드비히 2세의 재위 시절인 19세기 후반 독일 정세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독일 남부 비옥한 국토를 기반으로 한 바이에른 왕국의 대척점에 있던 북부 프로이센은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의 통치 아래 독일 통일 전쟁을 수행 중이었다.
루드비히 2세는 즉위 2년 만인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프로이센에게 패배했다.
이후 왕국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1871년 독일 제국 수립과 함께 제국의 일부로 흡수되고 만다.
그런 혼돈의 시기에 루드비히 2세는 국력을 신장시킬 생각 따위는 접어둔 채, 노이슈반슈타인성 건설에만 정력을 쏟았다.
바이에른 왕국 국고는 곧 바닥을 보였고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결국 루드비히 2세는 신하들에 의해 '정신병자'로 몰려 유폐당했다.
그리고 사흘 만에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암군의 광기는 백성의 고혈을 짜냈지만, 후손들에게는 훌륭한 관광 자원을 남겼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관광지답게 여행객을 위한 제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도 있었는데, 구색을 맞춘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가이드를 제공했다.
성 내부는 루드비히 2세가 나라를 말아먹을 정도로 공을 들인 티가 난다.
한 마디로 화려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다.
뮌헨, 뮌첸, 뮤니헨, 뮤니크.
발음도 가지가지인 희한한 동네다.
'뮤니크'라는 발음을 활용해 '유니크 뮤니크 Unique Munich'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딱히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도시다.
'뮌헨'하면 일단 떠오르는 건 맥주. 옥토버페스트의 고장이다.
시 중심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맥주 하우스 호객꾼들이 수시로 달라붙는다.
뮌헨은 맥주의 고장이기 전에 독일 남부 바이에른의 주도다.
시 중심에는 신시청사, 레지덴츠 등 고풍스런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주위로는 번화한 쇼핑가가 이어진다.
소개를 좀 자세히 하고 싶지만, 그놈의 통풍 때문에 맥주도 못 마셨고, 매연이 싫어서 일찍 도시를 떠났던지라 딱히 소개할 말이 없다.
독일 마지막 일정은 뮌헨이다.
사실 딱히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었지만, 오스트리아로 넘어가기 전에 한 번은 들러야 할 곳이었다.
로맨틱 가도에서 명을 다한 신발을 교체해야 했고, 국경을 넘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도 들러야 했다.
다만 노이슈반슈타인성에서 흥미 있게 봤던 비텔스바흐 왕가의 궁전 '레지덴츠'는 한 번쯤 들러보고 싶었다.
퓌센을 떠나는 날도 폭설이 이어졌다.
캐리어를 끌고 걸을 날씨가 아니었기에 택시를 불렀다.
2km 남짓한 거리를 이동했는데, 요금은 7.8유로(대략 1만 원)가 나왔다.
10유로를 냈더니 기사는 알아서 1유로를 팁으로 계산해 거스름돈을 거슬러 줬다.
독일 대중교통 요금에 질릴 지경이었다.
함박눈에 뒤덮인 퓌센 역은 제법 볼만했다.
아내는 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다며 호들갑이었다.
시간이 되자 기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남부 독일 풍경은 기가 막혔다.
눈구경에 신이 났던 아내는 의자에 앉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역시나 부러운 능력이다.
퓌센에서 멀어질수록 눈발이 잦아들더니 간혹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뮌헨의 첫인상은 매캐했다.
중앙역에 내려 호텔로 가기 위해 지하도를 건너는데 매연이 코를 찔렀다.
잠시 호흡이 곤란했다.
그간 공기 좋은 곳으로 찾아다니며 정화됐던 폐가 오그라들었다.
뮌헨 중심가는 명동 거리 같았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이 골목을 가득 메웠고, 시종일관 분주하고 정신없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미간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대도시의 호흡을 따라가는 동안 각박해진 탓인지 사람들 표정에는 온기보다 냉기가 더 짙게 묻어났다.
레지덴츠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을 통치했던 비텔스바흐 왕가의 궁전이다.
14세기말 공사를 시작해 수없이 개축, 증축을 거듭했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현재 모습을 갖췄다.
투박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시선 닿는 구석구석 예술가의 손길과 군주의 집착이 느껴진다.
왕가의 역대 왕 121명의 초상화를 전시한 '선조화 갤러리'는 '황금을 발랐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궁전 내에는 왕을 위한 개인 예배 공간이 있었다.
신과 대면할 공간을 황금으로 채웠다.
신에게 황금이 무슨 소용이랴.
여기도 인간의 오욕이 꿈틀거렸다.
제대의 주인은 황금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바벨탑 이야기는 피상적이었나 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애당초 뮌헨은 관광을 목적으로 갔던 곳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로 넘어가기 전 짐을 정비할 필요 때문에 들른 곳이었다.
뮌헨에서 고어텍스 기능을 상실한 트레킹화를 버리고 새 신을 샀다.
7년 간 길을 나설 때마다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줬던 신발이었다.
덕분에 눈비에도 걱정 없이 길을 나섰고, 먼 길도 든든했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에 시달린 탓인지 쿠션이 거의 사라졌고, 비가 오니 발이 젖었다.
어쩔 수 없이 새 신으로 바꾸고 헌 신은 호텔방에 버려두고 나왔다.
불 꺼진 호텔방에 덩그러니 남겨진 신발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여행을 떠나올 때,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긴다는 생각을 했다.
30대 때의 여행을 책임졌던 전우를, 그가 최후를 맞은 전장에 남겨두고 길을 떠나는 느낌이랄까?
문득 이 여행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로 남을지 궁금해졌다.
굿바이, 뮌헨.
기대가 크지 않았던 만큼 아쉬움도 없었다.
대신 마음을 비운 만큼 소소한 재미를 느꼈던 곳이다.
이제 오스트리아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