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보다 오늘이 더 행복한 삶
지독하게 힘든 20대를 보내며 깨달은 바가 있다면 행복도, 불행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행복도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불행으로 사라지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불행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20대에 만난 행복과 불행은 내게 그랬다.
20대,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일도 사랑도 매우 서툴렀다.
일은 힘들었고, 사랑은 어려웠다.
아등바등 살아도 일은 더디기만 했고, 사랑은 달아나기만 했다.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나만 아픈 건 아닐 테니까.
불행이라고 느끼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능숙하게 잘하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사고는 차원이 달랐다.
일이나 사랑 따윈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한순간에 내 인생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때 왜 죽지 않고 살았느냐고 다그치듯 사고 이후 남겨진 숱한 과제들이 내 목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숨이 막혔고, 때론 죽고 싶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둔 터널에 갇힌 기분이었다.
신에 대한 원망, 사회에 대한 분노로 내 삶은 온통 절망으로 얼룩졌다.
그래도 어머니의 절실한 기도, 가끔 찾아오는 작은 희망들로 하루를 버틸 수 있었고, 살아야 한다는 희박한 의지가 불행을 조금씩 밀어냈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갈 즈음,
불행이 마침표를 찍으면 행복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나는 공허함에 갈 길을 잃고 헤맸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고민에 빠졌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인생 2막을 위해 그냥 ‘질러보자’였다.
어차피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으니까.
하던 일을 그만두고 무작정 호주로 여행을 떠났다. 말이 좋아 여행이지, 도피에 가까웠다.
얼마나 있을지, 어디에 묵을지, 가서 무엇을 할지 아무 계획이 없었다.
그냥 한국을 떠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무계획으로 시작된 3개월 여정은 '행복한 삶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찾은 행복은 의외로 소소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느리게 사는 것.
그리고 내일보다 오늘을 더 행복하게 사는 것.
서른과 함께 시작된 행복은 일에는 여유를, 사랑에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 용기에 만난 사람이 지금 남편이다.
격동의 20대를 보낸 나와 달리 남편은 30대에 그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이미 그 시기를 보낸 나는 남편이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갖길 바랐다.
하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직장에서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완전무장한 남편은 내 얘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남편에게 숨 쉴 구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매년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남편은 내 의견에 흔쾌히 동의했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한 해 달력을 보고 여행 일정을 미리 잡았다.
이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키자고 약속했다.
직장을 다녔던 남편은 1주일 이상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상대적으로 이동이 가까운 나라를 여행지로 선택했고, 기간은 길어야 5박 6일이었다.
하지만 좁은 선택지와 짧은 시간은 늘 아쉬움을 남겼다.
나는 좀 더 넓은 세상을, 좀 더 오래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다니며, 천천히 느껴보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여행의 걸림돌은 늘 시간이었다.
돈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지만 시간은 아니었다.
특히 직장에 묶여있는 남편에게는 불가능했다.
당시 남편은 부조리한 회사 문화에 지쳐 부정적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보는 게 힘들었던 나는 지금이 남편에게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일을 그만두고 긴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떠하냐고 남편을 설득했다.
남편이 회사를 벗어나면 예전의 긍정적인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래 행복을 위해 현실을 담보하지 말자!’던 우리 다짐도 상기시켰다.
하지만 남편은 쉽게 설득되지 않았다.
마흔이 가까워 퇴사하는 것은 위험 요소가 너무 크다고 했다.
회사를 나가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이미 프리랜서였던 나는 남편이 가진 장점을 나열하며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남편은 내가 하는 이야기가 뜬구름 잡는 허황한 꿈이라 말했다.
몇 해를 버티고 버티던 남편은 회사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퇴사를 선언했다.
걱정과 달리 퇴사 후 남편 모습은 매우 홀가분해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나게 됐다.
낭만이 넘쳐 흐르는 곳이라 기대했던 유럽으로.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갈 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어도, 불러도 멜랑콜리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40대가 눈앞으로 다가오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고 있던 일이 평생 직업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20대 초반에 IMF를 겪으면서 이미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은 허상이라는 걸 깨달은 터였다.
게다가 회사 상황은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고, 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지치는 일이 반복되면서 기력이 점점 고갈되어 갔다.
우울증이 오려는 것이었는지 작은 일에도 쉽게 화가 났고 공격적인 성향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유탄은 대부분 아내에게 떨어졌다.
결혼 후 아내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종종 긴 대화를 나누곤 했다.
화제는 달랐지만 결론은 언제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 잡히지 말자'는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돈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행복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이뤘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진로를 틀기로 했다.
가끔 대책 없이 인생 2막을 '질렀다'는 이야기를 접하곤 했지만, 'P인 줄 알고 살았는데 결혼하고 나서 살아 보니 파워 J'였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아내와 나, 둘 다 직장에 얽매이지 말고 프리랜서로 살기로 했다.
향후 3년 내에 번역가로 자리를 잡는다는 거시적인 계획을 세운 후,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검토했다.
창피하지만 10년 간 미뤄놨던 석사 논문을 이를 악물고 해치웠다.
회사를 그만둔 후에는 번역가 양성과정에 들어가 교육을 수료하고, 여행을 다녀온 뒤 차근차근 경력을 쌓기로 했다.
아내는 이미 나보다 먼저 프리랜서 강사로 새로운 이력을 쌓기 시작한 상태였다.
인생 2막을 여는 서장은 당연히 여행이었다.
긴 여행을 통해 소진된 에너지를 충전하고 영감을 얻어 돌아오길 바랐다.
아내 의견에 따라 목적지는 유럽으로 정했다.
언젠가 동화를 쓰고 싶다는 아내 소원에 따라 이른바 '동화가도'라고 불리는 독일 메르헨 가도를 첫 루트로 잡았다.
이후에는 두 달간 독일-오스트리아-체코-헝가리-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를 여행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계획을 세우고 비행기 표를 예매한 후 사직서를 제출했다.
희망에 차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준비 단계부터 삐걱댔다.
아내는 '케세라세라' 스타일이었고, 나는 사소한 것까지 미리 준비해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었다.
우습게도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스스로를 정반대의 캐릭터로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난 꼼꼼한 계획은 여행 재미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함께 여행을 준비하다 보니,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움직인다는 게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때문에 준비 기간 내내 유난을 떨며 스트레스를 받았고, 아내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았다.
혼자 살 때는 몰랐던 내 본모습이 아내라는 거울을 통해 낱낱이 까발려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확인하는 과정은 꽤나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좌우간 준비는 끝났고, 출발 날짜가 다가왔다.
이 이야기는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함께 써 나갑니다.
서로 다른 성격, 성장 배경, 가치관을 가진 두 사람이 여행을 통해 다투고, 화해하고, 이해해가는 과정을 복기해보려 합니다.
아마 여행기를 빙자한 반성문이 될 듯합니다.
부디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