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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Oct 07. 2024

요정이 살던 마을

뜻밖의 친절


"내 말이 말이지, 전쟁통에 하반신이 날아갔단 말이야! 그래서 물을 마시는 족족 뒤로 나오더라니까?!"




보덴베르더 Bodenwerder



독일 북부를 관통하는 베저강 중류에 위치한 소도시로 <허풍선이 남작>의 주인공 '뮌히하우젠 남작(Baron Münchhausen)'이 태어난 곳이다. 

<허풍선이 남작>은 주인공 뮌히하우젠 남작이 젊은 시절 러시아, 터키 및 아시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모험한 후 겪은 이야기를 허풍과 함께 풀어낸 이야기가 골자다. 

뮌히하우젠 남작은 1720년에 태어나 1792년 사망한 실존 인물이며, 실제로도 농담을 좋아하는 쾌활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뮌히하우젠 남작의 본명은 '히에로니무스 카를 프리드리히 프라이헤르 폰 뮌히하우젠(Hieronymus Carl Friedrich Freiherr von Münchhausen)'이다.

도시 중심 구 시가지에는 뮌히하우젠 남작 기념관 및 기념 동상, 분수 등 동화와 관련된 콘텐츠들이 남아 있으며, 중세시대 목조 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사실 <허풍선이 남작>은 그림동화와는 상관이 없다.

메르헨가도는 그림동화와 관련된 콘텐츠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동화 가도'라는 이름대로 각종 동화와 관련된 콘텐츠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도시 자체가 크지 않은 데다가 구 시가지도 작아 돌아보는 데 1~2시간이면 충분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관광안내소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한 시간에 한 대 있는 버스 요금은 6.9유로. 20km 남짓한 거리를 감안하면 꽤 비싸다. 

독일 대중교통 요금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된다.


버스 시간표에 나온 보덴베르더 역은 달랑 하나였다. 

그래서 보덴베르더 진입 후 정류장에 버스가 서자마자 내렸더니 허허벌판이다.

거대한  'REWE' 마트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고, 주위로는 전원주택이 몇 채 들어서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하멜른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버스 시간표에 문제가 있었다. 

보덴베르더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시간표에는 버스 정류장이 두 개였다. 

즉, 우리는 구 시가지가 아니라 보덴베르더 시 외곽에 내린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전원주택단지는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아내는 집 하나하나를 세심히 살피면서 '이런 집 짓고 살고 싶다'는 말을 연발했다.  




우리는 어느새 언덕 꼭대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는 교회 첨탑과 오래된 집들이 보였다.

그곳이 우리가 가려던 보덴베르더라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척에 두고도 거기까지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만능에 가까운 구글지도도 보덴베르더 외곽에선 통신 신호가 잡히질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주택단지에서 셀룰러 데이터가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디지털 유목민이 디지털 난민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은 망한 것 같다"


아내와 마주 보고 허탈하게 웃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50m쯤 걸어 내려왔을까?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주택가 아래쪽에서 얼굴에 주근깨 가득한 소녀가 나타났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말을 걸었다.


"혹시 영어 할 줄 알아요?"


"조금요"


다행이었다. 

계곡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로 가는 길을 물었다.

소녀는 우리가 방금 내려온 언덕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쭉 올라가면 돼요"


언덕 꼭대기에 닿기 전 어딘가에 샛길이 있었나 보다.

허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맙다고 인사한 후 다시 언덕을 올랐다.

터덜터덜 걷는 우리 곁에 소녀도 함께 걸었다.

이윽고 언덕 꼭대기에 도착했다.

길은 거기서 끝났다.

소녀가 언덕 아래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가리켰다.


"저 길을 따라가면 돼요"


말을 마친 소녀는 올라왔던 언덕길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순간 뒷골이 찌릿했다.


"혹시 우리 길 알려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귓불이 발갛게 물든 소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몸을 돌려 길을 내려갔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굳이 따라와 길을 알려주고 떠났다. 

어찌 보면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진 친절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낯선 곳에 대한 긴장감 때문일까? 

일상을 벗어나 여유를 찾기 위해 떠나온 여행에서, 나는 여유를 잃고 있었다.

아내와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미묘한 감정싸움을 벌이며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뜻밖의 친절에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과연 소녀가 가르쳐 준 오솔길 끝에 보덴베르더가 나타났다. 

적어도 우리에게 소녀는 동화 속 요정이었다. 


요정의 길






오솔길 끝에 구 시가지가 보였다.

높다랗게 솟은 교회 첨탑이 '여기가 보덴베르더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평일 오전, 사람들은 다 일터에 나갔는지 마을은 한산했다. 

어렵지 않게 구 시가지 입구에 닿을 수 있었다. 


보덴베르더는 잘 조성된 관광지는 아니었다. 

동네는 투박한 느낌이 물씬 풍겼고, 구 시가지 내 목조건물은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이었다.

골목에 들어섰더니 삐뚤빼뚤한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불규칙한 리듬이 흥미로웠다.

카메라를 꺼내 들고 골목 사진을 찍고 있자니 개를 데리고 장에 다녀온 노인이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관광지로 생각한 곳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문득 노인의 일상을 훔쳐본 것 같아 부끄러웠다. 






목조 가옥이 늘어선 골목길을 따라 걸으니 마을 중심 광장이 나왔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소박한 교회가 늠름하게 서있었고, 길을 따라 허풍선이 남작 분수까지 상점가가 이어졌다. 

보덴베르더 구 시가지는 대단히 작다. 

전체를 돌아보는데 2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허풍선이 남작>이라는 동화가 있다는 것만 알고 갔지, 뮌히하우젠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여길 뭐 하러 왔던가'하는 허탈함도 조금 느껴졌다.

아내는 직접 답사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만족한 듯했는데, 나는 아니었다.



이런 취향 차이는 이후로도 내내 갈등의 씨앗이 됐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는 의사 표현을 명확히 해야 했는데 배려한다는 생각에 속으로 삭였다. 

짧은 연애 끝에 결혼했고 결혼 후에는 각자 생활에 바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그래서 서로 감정 표현에 서툴렀다.

배려라는 착각은 시한폭탄이 되어 차곡차곡 쌓여갔다.

결국 갈등은 한 달간 잘 숙성된 후 오스트리아 빈에서 터져버렸다. 


"껄껄껄... 뭐 별 시답잖은 걸로 싸우고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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