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게임, 컬트 오브 더 램
아트가 깔끔하고 귀여웠다. 근래 나온 게임 중 아트 스타일로는 이 게임을 넘어서는 게임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사이비 교단이라는 다소 컬트적인 소재임에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을 정도였다. 바로 매시브 몬스터의 <컬트 오브 더 램>(이하 양교단) 얘기다. 게임을 시작하니 나는 죄를 지은 한 명의 어린 양이 되어 처형식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죽기 직전 '기다리는 자'라는 인물에게 구원받는 연출은 인디 게임 치고는 괜찮은 시작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을 구원해준 '기다리는 자'를 위해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교단을 꾸려나가는 사이비 교단의 교주가 되기로 했다.
순조로운 교단 운영에 걸림돌이 있었다. 나를 죽이려 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구원해준 기다리는 자의 힘을 봉인한 옛 신앙의 무리 말이다. 이 불구대천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는 처지였다. 힘을 길러야 했다. 던전에 들어가 포로를 구출하든, 옛 신앙의 무리 중 일부를 강제로 교화시키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단의 추종자를 늘려야 했다. 그래야 옛 신앙의 무리의 보스 격인 4명의 교주들을 죽일 수 있었으니까. 이들을 전부 물리쳐야 우리 교단의 최종 목표였던 기다리는 자의 봉인을 풀 수 있었다.
전투는 가벼웠다. 게임에서 스페이스 바를 누르면 적의 공격을 굴러서 회피하는 기술이 있는데, 이 기술의 성능이 너무 좋았다.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거리, 넉넉하게 주어지는 무적 시간. 왠만한 적들에게 맞을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적들도 다양하지 않았고 보스 몬스터의 패턴도 매우 단순했다. 처음에 주어지는 무기가 이 게임에서 제일 성능이 안 좋은 단검류만 아니라면 무난하게 게임 클리어가 가능했다. 단검을 들어도 클리어하기가 조금 짜증이 날 뿐, 클리어를 못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귀찮았던 건 교단 경영이었다. 틈만 나면 영지 구석구석에 똥을 싸재끼는 추종자들을 보고 있자니 현자타임이 왔다. 아니, 교주는 난데 왜 추종자들이 똥을 안 치우고 내가 똥을 치워야 하나? 의문이 샘솟았지만 별 수 없었다. 안 치우면 영지의 위생이 안 좋아져서 추종자들이 병에 걸려 죽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심심하면 무슨 던전에서 풀떼기 몇 개 갖고 와달라하질 않나. 마음에 안 드는 추종자 놈이 있다고 해서 똥으로 만든 음식을 먹이라고 하질 않나. 던전 한 두번 다녀오면 열심히 키우던 추종자 하나가 늙어서 아무런 일도 시키지 못하는 노인이 되어버리질 않나. 매일 추종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줘야 하질 않나. 웃긴 건 하기 싫어서 안 하면 추종자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더라. 감히 왜 추종자'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냐면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 게임은 자본주의에 대한 고도의 비꼬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노동자(추종자)를 위해 지루하고 힘든 경영을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교단의 경영자(자본가)가 되는 게임이지 않은가. 노동자의 업무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자기계발의 숭고한 경험으로 느끼도록 하는 게 자본주의가 노동자에게 추구하는 궁극의 미덕이자 지상명령이라는 건 자본주의의 속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거진 다 알만한 얘기다. 이 게임은 오히려 정반대다. 자본가 입장인 교단의 교주가 노동자 입장에 서있는 추종자의 똥을 직접 치우거나 던전에 들어가서 풀떼기 몇 개 가져오는 식의 하찮은 심부름을 하도록 요구받는다. 웃긴 건 추종자를 최소한 20명 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면 엔딩을 볼 수가 없어서 매일 위험한 던전에 들어가서 직접 추종자를 구해오거나 비싼 돈을 주고 추종자를 사와야 한다. 추종자한테 시킬 수도 없고 교주가 직접 수행해야 한다. 도움이 될만한 요소는 쥐꼬리만큼도 없고 허구한 날 교주한테 심부름이나 시키는 짐덩어리를 말이다. 무엇보다 그런 시시콜콜한 경영이 마치 교단의 운영을 위해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교주의 숭고한 희생 행위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어쩌면 이 사이비 교단이라는 설정도 자본주의를 풍자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숨기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설정일지도 모른다. 이 게임은 반(反)자본주의적인 빨갱이(?) 게임이었던 것이다!
정치적 풍자(?)의 기능은 제쳐두고, 게임 자체에 대해 소감을 덧붙이자면 양교단은 매우 쉽고 가볍다. 게임이 덜 만들어진게 아니냐는 평가도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 게임은 처음부터 인디 게임을 주로 하는 하드코어 플레이어가 아니라 다수의 캐주얼 플레이어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게임을 디자인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드코어 플레이어들의 실망과 달리 게임은 일주일 만에 무려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무난한 게임성과 깔끔한 아트가 캐주얼 플레이어들에게 크게 어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기묘한 위화감이 일지도 모른다. 연재 글 서문에서 나는 단순히 캐주얼한 게임뿐만이 아니라 나름대로 게임 플레이의 깊이를 갖춘 게임을 소개한다고 했었다. 이 게임은 명백히 본 연재의 취지에서 벗어난다. 게임의 형식은 던전 전투에서는 <더 바인딩 오브 아이작>을, 교단 운영에서는<돈 스타브>를 합친 게임처럼 보이나, 위 게임에 비하면 깊이가 턱없이 부족하다. 당장 올해 나온 게임들과 비교해봐도 액션 어드벤처로서의 깊이는 <튜닉>에 비할 수 없고, 로그라이트로서의 다회차성은 <로그 레거시 2>가 더 낫다. 모바일로 포팅이 되어있긴 하지만 장르적 특성상 모바일로는 플레이하기가 제법 불편한 편에 속한다. 접근성이 좋은 게임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 게임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이 게임은 근래 나온 그 어떤 인디 게임보다도 더 모바일 게임의 게임성에 가깝다. 모바일로는 조작이 불편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기존 모바일 게임이나 MMORPG가 가지고 있는 게임의 구조적 특징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던전에 가서 XX를 몇 개 모아오십시오와 같은 추종자의 심부름을 하다 보면 MMORPG나 모바일 RPG에서 수없이 해온 반복 수집 퀘스트를 수행하는 느낌을 그대로 받는다. 교단을 경영하다 보면 클래시 오브 클랜과 같은 인기 모바일 게임과도 유사한 플레이 감각마저 느낀다. 게임의 구조가 모바일 게임과 상당히 유사함에도 과금은 없다. 현세대 모바일 게임의 맹독성 과금은 싫지만 모바일 게임과 유사한 게임을 해보고 싶다면, 이 게임이 아주 강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도전적이지는 않지만 구색은 갖춘 전투, 아이템 수집 요소, 경영 및 성장의 시뮬레이션적 재미, 귀여운 아트 스타일 등. 쉽고 편안한 게임을 원한다면 이만한 게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
쉽고 간편한 게임을 원하시는 분
생각하면서 게임하는 게 싫으신 분
도전적인 게임을 원하시는 분
게임을 플레이할 시간이 매우 부족하신 분
스마트폰으로만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신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