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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적인튀김요리 Jan 15. 2022

나쁜 기억도 쓸모가 있어

스물여섯 번째 책 <한밤 중 달빛 식당>

<깔끔하게 꽂는 책꽂이>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작품을 선생님의 관점에서 읽고 소개합니다. 주변에 책이 재미없다는 이유로, 지루하다는 이유로 혹은 길거나 어렵다는 이유로 멀리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책을 권하고 함께 이야기하고 공감하며 천천히 그리고 끝까지 읽어보세요. 그러면 아이들은 분명, 그다음의 책을 스스로 찾아 나설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나쁜 기억을 극복할까요? 누구와의 이별 앞에서 감당하기 힘든 슬픔 앞에서 불편한 사실 앞에서 거대한 스트레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할까요?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는 외면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상황을 그냥 피해버리는 것이죠. 하지만 외면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잠깐 잊어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혹은 거짓말로 나의 나쁜 기억을 그럴듯하게 포장해버리기도 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상황을 부정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죠. 그럼에도 우리는 이 두 가지 선택지를 쉽게 선택합니다. 우리는 나쁜 기억을 마주하고 극복하는 데 서투니까요.


<한밤중 달빛 식당>도 이런 '나쁜' 기억을 다루는 책입니다. 여우가 운영하는 달빛 식당은 한밤중에만 열립니다.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도, 시간대도 아리송한 식당은 음식의 값도 특별하게 책정했습니다. 나쁜 기억으로 값을 치르면, 아주 맛있고 멋진 음식을 내어주죠. 나쁜 기억을 없애주는 데다가 맛있고 멋진 음식까지 내어주니 일석이조입니다. 주인공 연우도 망설이지 않고 나쁜 기억을 내고 맛있는 케이크를 먹습니다. 친구의 돈을 훔쳤던 나쁜 기억을 음식값으로 지불했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진 기억에 연우는 자신이 동호의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덕분에, 연우는 친구에게 용기 있게 사과할 수 있는 기회도 까맣게 잃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찾아간 달빛 식당의 메뉴는 맛있는 커스터드 푸딩입니다. 오늘 음식을 먹으려면 나쁜 기억을 두 개 내어야만 합니다. 오늘도 연우는 망설이지 않고 제일 나쁜 기억 두 개를 내서 맛있는 푸딩을 먹었습니다. 그때, 식당으로 웬 아저씨가 들어섰습니다. 술에 전 아저씨는 온통 검은색으로 치장을 했습니다. 아저씨는 하염없이 울면서 모든 나쁜 기억을 줄 테니 이젠 먹을 수 없는 아내가 끓인 청국장을 내어달라고 주인장에게 부탁합니다. 한 숟갈 한 숟갈 청국장을 떠먹는 아저씨의 슬픈 표정은 점점 사그라들었습니다. 마치 기억을 점점 잊어가는 것 같이 말입니다.


다음 날, 연우는 검은색 아저씨를 또 만났습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검은색 아저씨를 말이죠. 연우는 기억을 잃어버린 아저씨가 왠지 슬퍼보였습니다. 왜일까요. 나쁜 기억을 지웠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연우는 궁금합니다. 그리고 연우 역시, 마음 한켠이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연우는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불편함과 아저씨의 슬픈 얼굴이 떠올라 더 이상 달빛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지 않죠. 하지만 연우는 이미 세 가지 나쁜 기억을 값으로 치렀습니다. 무엇을 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 연우는 무엇을 잊었을까요, 그 기억을 잊어서 행복해진 걸까요?


"엄마요? 엄마에 대한 기억을 왜 해요? 엄마에게 무슨 일 있어요?" (60쪽)


연우가 낸 세 가지 나쁜 기억 중 하나의 기억은 엄마의 죽음에 관한 기억이었습니다. 연우는 엄마와의 이별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분명 나쁜 기억입니다. 그런데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않습니다. 연우가 갖고 있던 나쁜 기억은 분명 연우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니까요. 여전히, 연우 옆에는 엄마가 없습니다. 연우는 단지 엄마와 얽힌 나쁜 기억을 지불했지만 연우가 지불한 건 나쁜 기억뿐만 아닙니다. 나쁜 기억을 마주하고 스스로 극복해나갈 수 있는 기회까지 지불한 것이죠.


연우는 자신이 식당에 낸 나쁜 기억을 돌려받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다행히 늦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단, 기억을 도로 돌려받는다면, 다시는 달빛 식당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연우에게 나쁜 기억은 연우의 마음 한 켠에 자리 잡아 평생을 괴롭힐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연우가 돌려받고 싶은 건, 나쁜 기억이 아니라 그 나쁜 기억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일 것입니다. 연우는 식당 냉동고에 담긴 나쁜 기억을 다시 돌려받습니다.


"난 그날의 기억이 너무 싫었어. 그리고 엄마가 영영 없는 그다음의 기억들도 다 싫었지. '사랑해, 기억해.' 내가 여우에게 준 나쁜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엄마의 그 마지막 말이 내게로 돌아왔어." (74쪽)



분명, 진짜로 영원히 없애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쁜 기억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건 결국 오롯이 '나'에게 달려 있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위로를 받을 수는 있지만 결국 나아가는 건 우리 자신입니다. 한밤중 달빛 식당처럼 기억을 없애주는 마법도 자신의 잘못이나 나쁜 기억을 포장하는 거짓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나쁜 기억에 마주하고 스스로 헤쳐나가야 합니다.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용기 있게 용서를 구할 줄 알아야 하고 슬픈 일에도 한바탕 울고 다시 일어서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한밤중 달빛 식당>은 나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한지를 묻는 책이 아니라, 나쁜 기억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한지 묻는 책입니다. 연우의 아빠는 기억을 잃은 연우를 보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술로 잊으려고 했던 자기 자신을 자책합니다. 결국, 아빠도 연우를 통해 그 나쁜 기억과 마주해야 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빠도 그동안 네 엄마 없이 산다는 게 무서웠어. 그래서 늘 숨고 싶었어. 내가 진짜 겁쟁이야."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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