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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Oct 23. 2021

카시나 아카디움(Kasina Arcadium)

여행은 살아보는 거라며 언제부터인가 한 달 살기가 여행의 트렌드가 되었다. 가능한 많은 도시와 랜드마크들만 방문해서 깃발만 꽂고 돌아오는 수박 겉핥기 식의 여행에서 여행하는 도시의 랜드마크는 물론 지역 주민들만 아는 숨은 여행지를 방문하고 지역의 일상을 살아보는 좀 더 깊은 경험의 방식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 직장인에게 있어 여행은 주말을 활용한 2박 3일 동남아 여행이나 일본, 중국 같이 비행기로 2, 3시간 안에 갈 수 있는 여행지가 보통이었다. 휴가를 사용하더라도 9박 10일 정도 갈 수 있을까? 10일이라는 시간이 있어도 한국 사람이라면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도시를 갈 수 있을까 셈을 하고 있을 거다. 몇몇 패키지 여행 경로를 보면 8일 여행에 스페인의 8 - 9개 도시를 일주한다던가, 12일 여행에 서유럽 6개 나라(도시가 아니라 나라다)를 돌아본다던가 하는 일정이 예사이다. 이동 시간만 합쳐도 24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이런 일정에서 여유를 찾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여행을 일처럼, 전투적으로 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여행의 여유를 찾아준 것이 바로 이 한 달 살기가 아닐까. 짧은 시간에 쫓기듯 여행할 필요 없이 한 달이라는 절대적인 시간이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모든 직장인이 선뜻 한 달간의 휴가를 내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지만 각종 매체에서 한 달 살기에 대한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면서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해’에서 ‘기회만 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정도로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 그와 함께 비록 짧은 여행이라 하더라도 ‘찍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를 ‘경험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 달 살기가 대중화되면서 살아보고 싶은 추천 도시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가까운 일본이나 상대적으로 체류 비용이 저렴한 동남아 등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미국에서는 하와이, 뉴욕, LA, 포틀랜드 등이 후보지로 떠올랐는데 2018년 유튜브 여행 채널인 ‘여행에 미치다’에서 포틀랜드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포틀랜드는 한 달 살기가 유행하기 전부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유명했던 도시이다. 킨포크(KINFOLK)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잡지 이름으로 혹은 삶의 방식으로 알고 있는 이 킨포크 문화가 바로 포틀랜드에서 시작되었다. 킨포크 문화는 가까운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며 삶의 속도를 늦추고 소박한 일상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통용되고 있는데 지역에서의 삶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 포틀랜드 사람들의 성향과 잘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이런 지역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비즈니스에서도 잘 드러난다. 포틀랜드에서 유명한 키워드를 몇 가지 꼽아보자면 킨포크, 맥주, 커피, 장미 정도일까.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킨포크와 커피 정도가 가장 익숙한 키워드일 것이다. 특히 포틀랜드의 커피는 커피 제3의 물결을 선도했다고 일컬어지는 스텀프타운(StumpTown)이 가장 유명하다. 이상한 점은 스텀프타운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떠오르는 브랜드가 없다는 점이다.


서울 면적의 약 60% 수준임에도 포틀랜드에는 약 80곳에 달하는 로스터리가 존재한다. 이 많은 로스터리들이 스텀프타운만큼 품질과 생산량에 있어 퍼포먼스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 그럴리는 없다. 미국 내에서도 포틀랜드의 커피 수준은 높기로 유명하고 이를 증명하듯 각종 매체에서 선정하는 미국 내 베스트 로스터리 리스트를 보면 20위권 내에 스텀프타운, 코아바, 하트 커피 로스터스(Heart Coffee Roasters) 등 포틀랜드의 로스터리가 2, 3개씩은 이름을 올린다. 인구수 대비 카페 수가 높은 도시인만큼 어쭙잖은 실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닌 것이다.


포틀랜드의 다른 커피 로스터리가 해외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지 않은 건 지역 시장이 활성화되어 로스팅한 대부분의 원두를 포틀랜드 내에서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고 지역 커뮤니티 내에서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틀랜드를 넘어 한국까지 원두를 제공하는 고마운 로스터리가 한 곳 있다. 바로 코아바(Coava) 커피이다.



2008년 창립자인 맷 히긴스(Matt Higgins)의 차고에서 탄생한 코아바 커피는 2010년 이스트 포틀랜드에 정식으로 플래그십 카페를 오픈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코아바 플래그십 카페는 다운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는 덕분에 차고인 듯, 창고인 듯 널찍한 공간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웬만한 실내 운동도 할 수 있을 만한 넓이이면서도 놓여있는 테이블은 몇 개 되지 않고 비어있는 공간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셔도 충분할 정도이다. 서울 성수동의 대림창고나 강화도에 있는 조양방직 같은 창고형 카페에서 비슷한 결을 느낄 수 있겠다. 이런 개방적인 공간 활용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이 마치 포틀랜드 주민들이 지향하는 지속 가능하고 자유로운 삶의 방향과 맞닿아 있는 듯싶다.


맷 히긴스는 그가 살고 있는 포틀랜드에 이전과 달리 새롭게 해석한 커피를 선보이고 싶었다고 한다. 2008년 자신의 비즈니스를 시작하기 전에도 이미 오랜 시간 커피 업계에 몸을 담고 있었던 그는 그동안 자신이 배운 모든 지식을 코아바 커피에 쏟아부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커피는 포틀랜드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미국의 커피신에서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포틀랜드에만 4개의 지점이 있어 코아바 커피를 맛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들여 방문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코아바의 원두를 맛볼 수 있다는 건 상당한 행운이다. 몇 년 전 압구정의 한 카페에서 스텀프타운의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비록 단독 런칭이 아닌 콜라보 형식이었지만 커피로 유명한 포틀랜드 로스터리의 원두를 맛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되었는데, 도산공원과 맞닿은 곳에서 같은 포틀랜드의 로스터리인 코아바 커피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코아바의 공식 디스트리뷰터인 카시나 아카디움의 문에는 “Portland meets Seoul(포틀랜드, 서울을 만나다)”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카페에 들어서면 단순히 코아바 커피를 사용하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마치 포틀랜드 교외의 카페에 온 듯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날 것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철근 인테리어는 물론 시원하게 뚫린 노출형 천장으로 거의 2개 층높이에 달하는 층고 덕분에 한층 넓어 보인다. 주문을 받는 바리스타들의 분위기도 여느 카페보다 캐주얼하고 자리에 앉은 손님들도 어딘가 포틀랜드에 온 듯 여러모로 자유로운 복장과 모습을 하고 있다.

커피 원두는 에쏘 블랜드와(S.O. BLEND)와 킬렌소(KILENSO)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으며 매장에서 제공하는 팬케이크 등의 메뉴와 함께 먹으면 한층 풍미를 즐기며 마실 수 있다.


한 달 살기를 위해 포틀랜드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하루 정도의 짬을 내어 커피 한 잔을 하러 가는 여유는 삶에 활력소가 될 것이다. 카시나 아카디움에서 포틀랜드의 분위기와 맛을 느끼며 여유롭게 하루를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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