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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Oct 23. 2021

인텔리젠시아(Intelligentsia)

‘블러드 다이아몬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으로 잘 알려진 이 영화는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을 배경으로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기 위한 정부군과 반군과의 내전,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강제 노역과 전쟁의 참상을 다룬 실화이다. 사랑의 증표로 여겨지던 다이아몬드의 어두운 면이 밝혀지며 시에라리온과 같은 분쟁 지역의 다이아몬드가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한 킴벌리 프로세스가 도입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프로세스도 완벽하지 않은 만큼 다른 대안을 세워야 한다며 공정한 무역을 위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처럼 커피 재배도 오랜 시간 노예 혹은 노동자 착취에 기대며 이루어진 어두운 역사가 있다. 17세기에 커피가 유럽에 전파되면서 유행처럼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영국 런던에는 300개가 넘는 커피 하우스가 들어서기에 이른다.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유럽 강국들은 식민지에 커피 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한다. 19세기까지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들에는 수많은 노예들이 끌려와 커피를 재배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표면적으로는 노예 제도를 통한 재배가 사라진 듯 했지만 가혹한 노동 착취와 불공정한 거래는 계속되었다.


20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공정 거래(Fair Trade)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20세기 말에 들어서야 무역 조건을 개선하여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제공하려는 움직임이 이는 듯 했다. 하지만 이 또한 노동의 주체인 생산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기보다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있는 협동조합이나 수출업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조합이나 업자에게 전달되는 돈은 공정할지 몰라도 생산자에게 얼마나 공정하게 전달될 것인가는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공정 무역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원산지 직거래, 이른바 다이렉트 트레이드라고 부르는 거래 방식이 시장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다이렉트 트레이드의 의미는 단순 명쾌하다. 직접 구매하는 것이다. 유통업체나 수출업자 누구도 거치지 않고 커피를 생산하는 주체와 직접 거래하여 정당한 값을 치르는 것이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많은 커피 회사에서 노동 착취가 일어나는 농장을 보이콧하고 있다. 그리고 다이렉트 트레이드는 새로운 개념에서 전 세계 커피신의 당연한 거래 방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노예 수준의 노동에 대한 보도가 종종 이어지고 있다. 2016년 브라질의 한 커피농장에서 장시간, 저임금 노동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보도되었고 이 농장의 구매자 중 한 곳이 세계 최대의 커피 업체 중 하나인 네슬레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에는 네스프레소에 원두를 납품하는 과테말라 농장의 아동 노동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오랜 시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사건은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듯 하지만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불합리한 일에 대해 함께 분노하고 고쳐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이렉트 트레이드는 이 선한 영향력이 전 세계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고 바로 이 시작에 시카고의 자랑인 인텔리젠시아가 있다.




1995년 시카고에서 출발한 인텔리젠시아는 현재 시카고를 포함하여 LA, 뉴욕, 오스틴, 보스턴에 약 15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창업자인 더그 젤(Doug Zell)은 창업할 당시에만 해도 커피로 전 세계를 제패할 원대한 꿈같은 것은 없었으며, 시카고에 매장을 연 것도 그 지역에 그럴듯한 커피바가 없어서 시장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뿐이라고 한다. 커피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품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2001년 다이렉트 트레이드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이를 실행하며 인텔리젠시아는 전 세계 커피신에 변화를 이끄는 퍼스트 펭귄[1]이 되었다. 지금이야 공정 무역이라던가 다이렉트 트레이드(Direct Trade) 등을 실천하는 로스터리와 카페가 많아졌지만 2000년 경에만 해도 일반 시장에서 그런 개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인텔리젠시아는 대중들에게 다소 비싼 커피라는 인식이 심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스타벅스의 브루잉 커피가 약 2달러(그란데 사이즈), 라테가 4.15달러(그란데 사이즈)인데 인텔리젠시아는 브루잉 커피가 4달러, 라테가 4.75달러 정도로 가격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생산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제공한다는 것은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제대로 된 급여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결국 인건비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상승된 금액은 메뉴판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인텔리젠시아를 자주 방문하는 고객들도 커피의 맛이나 서비스 등에 불만을 표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가격이 비싸다는 점에서는 한 마디씩 거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변화와 부침이 극심한 커피신에서 20년이 넘게 그 신념과 가치를 지켜온 것을 보면 사람들의 판단과 선택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커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브랜드이다. 한국에 정식으로 지점을 낸 것도 아니라서 그만큼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다이렉트 트레이드의 가치를 공유하는 공식 디스트리뷰터를 통해 인텔리젠시아의 커피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인텔리젠시아 커피 디스트리뷰터MH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이 공간은 인텔리젠시아의 원두가 진열되어 있는 쇼룸 공간이자 커피와 차를 즐길 수 있는 카페이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깔끔하면서도 넓은 내부 공간이 시원하게 반겨준다. 길게 뻗은 원목 바 테이블에는 커피 추출 도구들이 나란히 구비되어 있고 바에서 바로 커피를 즐길 수 있게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바로 앞에서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바리스타와 담소를 나눌 수도 있는 구조이다. 그 외에도 문쪽 창가의 테이블 자리와 카페 안쪽의 소파 자리가 하나씩 있는데 많은 손님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대화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커피에 집중하며 음미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메뉴는 여느 카페와 같이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와 브루 커피가 종류별로 준비되어 있다. 에스프레소에 사용되는 원두는 1995년부터 인텔리젠시아가 꾸준히 사용해온 블랙캣 클래식이다. 모든 로스터리들이 그렇듯 꾸준히 지켜오는 블랜딩 원두는 그 로스터리가 추구하는 맛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 로스터리가 원하는 커피 맛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 블랙캣 클래식은 신선한 산미와 균형 잡힌 맛 덕분에 에스프레소로 마셔도 풍부한 향을 즐길 수 있다.

브루 커피에 사용하는 원두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는데, 인텔리젠시아는 인시즌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계절마다 다양한 원두 라인업을 내놓는다. 원두도 음식이나 과일처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시기가 있어 최상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시기에만 한정적으로 원두를 판매하는 것이다. 덕분에 계절마다 새로운 원두를 가장 신선하게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추천하고 싶은 건 인텔리젠시아 커피 샘플러이다. 샘플러는 총 2가지 종류이다. ‘브루커피&한잔 더’는 브루커피 한 잔에 에스프레소나 라떼(카푸치노) 혹은 브루커피를 한 잔 더 마실 수 있는 세트이고, 에스프레소, 라떼(카푸치노), 브루커피를 모두 즐길 수 있는 ‘3가지 메뉴를 한번에’ 세트도 있다.

카페인에 약한 사람이 아니라면 3가지 메뉴를 즐기는 샘플러를 꼭 한 번 경험해보길 추천한다. 바리스타 입장에서는 손이 많이 가는 메뉴일 테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메뉴라고 하겠다. 커피의 기본이 되는 에스프레소와 거기에 우유를 더한 메뉴, 그리고 브루커피까지 마신다면 카페의 기본 메뉴를 모두 즐겼다고 할 수 있으니까.


대부분의 카페들이 그렇듯 샘플러는 카페의 메뉴를 알리는 차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에 가깝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가면 샘플러 메뉴가 사라지는게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러니 늦기 전에 샘플러 메뉴를 경험해보자. 이쁜 나무 트레이에 담겨 나와 사진을 찍기에도 좋고 특히 브루 커피는 바로 잔에 서빙되지 않고 커피 저그에 따로 담겨 나와 조금씩 따라 먹기도 좋다.

맛 좋은 커피를 마신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다. 그것도 커피 나무가 자라는 곳에서 멀고도 먼 이 땅에서 말이다. 이 행복을 유지하려면 그 근본이 되는 생산자, 즉 농부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정당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내가 지불한 커피 한 잔의 금액이 그들에게 정당하게 전달된다면 그 자체로 우리는 선순환의 고리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작은 기적을 이어가기 위한 커피 한 잔에 당신의 손을 보태보는 건 어떨까.

      


[1] 무리 중에서 가장 먼저 바다로 뛰어드는 펭귄.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선구자 또는 도전자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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