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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

by 이찬

면접을 치렀다. 꽤나 망친 것 같지만 슬프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숙제를 완료한 기분이라 후련했다. 한 편으로는 내가 바라지 않는 길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구나 싶었다.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준 사람은 부모가 아니었다. 부모의 친구분이 데려다주셨다. 그분은 내게 응원을 던지셨다. 그 응원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면접을 치른 핼러윈. 이제 내게 남은 건 수능이었다. 이미 안정권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수능 최저 등급을 맞출 필요도 없는 원서들이었다. 딱 하나. 논술이 남았다. 내 등급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대학에 넣으라는 압박이었다. 문제집도 사두었지만, 한 장도 펼쳐보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피나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길에 이미 내 노력은 충분하다.

더 이상 할 공부가 없는 내게 자유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데 아니었다. 논술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도 했고 허락도 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 큰 방에 갇혀있다. 대체 내가 뭘 더 해야 저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조용히 갇혀있는 것이다.

정말 갇힌다는 말이 어울렸다. 밥을 먹지 않았다. 두유 한 팩으로 버텨가며 어지러움을 감수했다. 앉아있지도 못할 어지러움을 대가로 그들을 피했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32평의 아파트 한 구석에서 존재감을 없앤다. 내가 그들과 마주칠 때는 커다란 공부방에서 내 침실로 이동할 때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살아간 날이 얼마나 될까. 내게는 수능이 찾아왔다. 사실 치르고 싶지 않았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과정에 힘을 쏟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험이 중요하다며 억지로 보내졌다. 원치 않는 시험인 만큼 진심도 아니었다. 남들 하나씩 다 있는 정리본 따위는 사치였다. 밥조차 도시락이 아닌 빵으로 대체되었다. 대강 있는 빵과 커피를 마시며 수능을 치렀다. 그래도 한 줄로 긋거나 잠을 자진 않았다. 나름의 지식으로 열심히 풀었다.

수능이 끝난 나를 맞이하는 부모. 어느 부모들과 다름없는 모습에 어색함도 잠시 마냥 기뻤다. 내가 이런 환대를 받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허울뿐인 시험이었지만 고생했다며 다독여주었다. 그동안의 힘듦이 잠시나마 씻겨져 내려가는 듯했다. 행복했다. 내가 이 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피하던 순간이 무색할 정도였다. 정상적이고 화목한 대화를 하는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마냥 좋다. 지금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당연히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정말 순간이었다. 내가 논술 시험을 보지 않은 날이었다. 꾸중을 들었다.

' 이럴 거면 넌 문제집은 왜 사. 네가 하겠다며. 도와준 내가 바보지. 그냥 다 때려치워! 관둬! '

분명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미리 말했다. 왜 저런 반응인 걸까. 내가 또 뭘 잘못한 걸까. 그 들이 바라는 길에 힘을 쏟지 않은 게 잘못인 걸까. 쏟아지는 두통에 약을 먹었다. 그 약이 한 알, 두 알 늘어갔다. 열여섯 알쯤 먹었나. 노곤해졌다. 그대로 세 시간가량 잠을 잤다. 더 잘 수 없었다. 구역감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 더 이상 화장실과 방을 번갈아 갈 필요성조차 못 느꼈다. 정말 오랫동안 변기를 붙잡고 토했다.

내가 고통에 몸부림칠 동안 내 부모는 잠을 청했다. 내가 아파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말도 했다. 그거 그냥 내가 아까 뭐라 해서 토하는 것 아니냐고. 그게 아니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한 시간가량을 화장실에 박혀있는데 관심도 없었다.


다음 날, 바로 집 앞에 있는 병원에 갔다. 진통제 열여섯 알을 섭취했다고 말씀드렸다. 처방약을 이틀 먹고도 어지럽거나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바로 응급실에 가라고 하셨다. 이런 몸 상태를 방치하는 부모는 무엇일까.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 걸까. 병원조차 부모 몰래 갔다. 부모는 내가 늘 아프면 꾀병이거나 스트레스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늘 방치되었다. 그저 늘 있던 일이다.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화목한 가정. 여섯 글자 속에서 벗어난 나. 도망치고 싶었다. 다 모르는 척 넘기고 싶었다. 내가 살아남는 방식은 회피뿐이다. 오롯이 다 받아들이면 나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41층 위에 붕 뜨는 나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내 세계에서의 나는 늘 현실이라는 존재를 피해 숨어 다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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