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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1)

by 이찬

나는 3학년이 되었다. 1년만 있으면 성인이 된다는 설렘과 수능을 치러야 한다는 압박감이 공존한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꼭 대학에 진학을 해야 했다. 그게 내 부모의 뜻이었다. 내 마음을 쓸 수 있는 곳에는 모조리 썼다. 나의 장래희망도 기록부도 작가에 맞춰놓았다. 생각이 있으면 정령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학과라도 진학시켜 주기를 바랐다.

딱히 공부에 연연하며 지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였다. 나의 꿈을 실현시켜도 될까 싶었다. 2년 내내 한 영화 동아리는 날 더 부풀게 만들었다. 밤까지 남아서 뛰어다니는 생활이었지만 행복했다. 나는 그저 행복을 더 오래 즐기고 싶을 뿐이다.


' 방사선과 가라. 여기 정도면 네 성적에 맞겠네. 가깝고 나름 알아준대. 근처 대학 병원도 다 여기 출신이라더라. 네가 바라는 건 대학 가서 해. 네가 네 돈 벌면서 해. 그때 가서 해도 안 늦어. '


나의 바람은 어떻게 평생을 이뤄지지 않을까. 평생이라기엔 19년이 너무 짧은 걸까. 그렇다기엔 내 주변은 다르다. 다들 자신이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찾는데 급급하다. 나는 급할 것도 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말이다. 더 이상 정할 것도 없는데 왜 반대인 걸까. 이유를 알지만 외면하고 싶다.

흔한 장녀들의 얘기를 알고 있다. 돈을 벌어 동생을 먹여 살리는 그런 진부한 얘기. 그게 나다. 미술을 준비하고 싶어 하는 동생을 위해 내가 돈을 벌어야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비참한 말을 대놓고 듣게 만든다.

' 네가 대학 가서 돈 벌어서 동생 대학 보내야지. 네가 먹여서 살려야 하는 거야. '

왜 나일까. 왜 나는 쓸모 있는 존재여야 할까. 나의 바람 하나 이뤄주지 않으면서 쓸모는 꼭 있어야 한다는 모순이 헛웃음을 치게 만든다. 늘 집에 가는 이 조용한 차 안, 잔잔한 바깥 풍경은 내 머리를 어지럽힌다. 다시금 눈을 감는다.


나의 선택이 가장 중요한 이 시기에 나는 배제되어 있다. 나 없이 결정하는 내 대학이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관심을 쏟아주지도 않는다. 그저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이라는 소리다. 그 틀이 너무 작고 견고한 척을 하는 게 우습기도 하다. 내가 퍽하고 치면 마치 부서질 것 같은 틀이다. 그러다 부수지 않는 건 나를 가두는 수많은 틀이 더 있는 걸 안다. 내가 더 이상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나타나면 그때의 나는 무너질 것만 같다. 지금보다 더. 딱 키워드 하나. 돈. 그거 하나를 바라보고 내 선택을 해야 한다.

나는 딱 키워드 하나. 돈. 그거 하나를 배제하고 선택을 하고 싶다. 내 눈앞에 있는 수많은 대학 정보들. 보기만 해도 어지럽다. 이 큰 방에 직접 갇힌 채 머리를 싸맨다. 그나마 직업적 연관을 지은건 복지와 교육이었다. 내 생활기록부와는 여전히 동떨어져있다. 그래도 어떻게든 도피를 할 수 있는 대안이 저 것뿐이었다.


' 장애인 복지과. 거기 괜찮네. 거기 넣어. 아, 그리고 방사선과 논술 전형도 있다며. 써. 준비해. '


내 미래에 나는 없다. 그저 쓸모 있는 도구로 이용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제는 머릿속에서 조차 내 꿈을 잃어가고 있다. 언제까지 나는 이 집의 도구일까. 어릴 적 쓰던 비눗방울이 방치되어 있듯이. 나도 그러하다. 저 구석 어딘가에서 방치되며 쓸모가 있기를 바란다.

친구들이 준비하는 미래가 참으로 부럽다. 내가 가려는 학과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한 친구가 있다. 모든 생활기록부가 방사선과에 맞춰져 있다. 정말로 흥미가 있고 가고 싶어 한다. 그 친구를 보면 괴리감이 올라온다. 나는 그저 돈 하나를 보고 간다. 내 눈앞의 친구는 본인이 희망하는 곳을 향해 열심히 노력 중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노력도 아니고 포기도 아닌 무력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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