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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해

by 이찬

다사다난하게 지나간 종강 시즌. 다시 학교를 가야 할 시간이 왔다. 어쩌면 기회가 될 시간이고 어쩌면 다시 절망에 빠질 순간이다. 교과서를 사고 학교를 나서는 모든 순간이 갈대밭 한가운데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수업을 들음과 동시에 나는 느꼈다. 이 갈대밭에서 길을 찾으려 해 봤자 소용이 없겠구나. 나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내 키만 한 갈대밭 사이에서 헤집고 다치고 지쳐갈 뿐이었다. 그렇게 상처투성이가 될 때쯤 무기력 해졌다. 내가 이곳에서는 길을 찾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는 무얼 해야 하지? 더 이상 길을 찾을 수가 없는데 어떡하지. 그렇게 나는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혼자 고립되었다.

고립된 내가 받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무력감과 스트레스. 그리고 학교에서 날아오는 학사 경고. 길을 찾지 못했기에 경고를 받았다. 나는 결국 맞는 길을 찾아 나가야만 하는구나. 홀로 웅크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나를 누군가 찾았다. 나만이 고립되어 있으면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던 내게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내게 말했다.

" 꼭 이곳에서 길을 찾지 않아도 돼. 저기 길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많아. 난 그저 네 옆에서 같이 그 길을 찾아주고 싶어. 그러니까 나와 함께 가자. "

나를 나라서 좋아해 주는 사람이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응원해 주는 사람이었다. 나의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그런 사람이 찾아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새로운 길을 향해 갈 희망을 주었다.


내게 날아온 경고장을 무시했다. 그와의 행복한 시간이 더 중요헀다.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이면 아프던 몸이 안 아팠다. 그만큼 행복과 안정을 받았다. 수십 번 나를 해하려 든 나의 세상에 해를 뜨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해하려 드는 것을 막고 따스함만을 나눠주었다. 내가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내가 외롭지 않게 했다. 내가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다시 갈대밭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게끔 노력해 주었다.

그래도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그날을 뒤로한 채 달려오다 보니 다시 내가 가야 하는 곳에 도착했다. 아무리 나를 애정으로 보살펴도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 그는 다시금 내게 다른 길을 제안했다. 저 밖에 네가 바라는 곳으로 나가자고 했다. 나를 짓누르는 장소를 벗어날 길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텅 빈 길을 내가 하나씩 지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함께 지어주겠다고 했다. 내가 무너져 내리면 자신이 벽이 되어 지탱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이 갈대밭을 나갔다. 황량하고 넓은 이곳. 나는 자유라는 나무를 먼저 심었다. 그가 내게 건넨 첫 번째 마음이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했다. 여행을 다니고 책을 읽고 썼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무엇인지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알아가는 시간은 길었다. 어려웠지만 즐거웠다. 내가 도무지 정하지 못하면 다시 저 갈대밭을 열심히 헤집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 더 심혈을 기울였다.


나에게 뜬 해가 다시 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군대를 가고 나서였다. 내가 무너지면 벽이 되어준다 하지 않았는가. 나의 벽은 떠났다. 더 이상 내가 무너질 때마다 기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내가 열심히 그에게 작은 벽을 세워주고 나무를 심어주었다. 하지만 버거웠나 보다. 내 작은 벽은 그가 기대기에 모자랐다. 내가 심은 나무는 그의 쉼이 되기엔 너무 작았다. 그렇게 점점 해가 져갔다.

함께한 지 500일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그는 내 동굴에 적응하지 못했다. 내가 이 넓은 곳에 세운건 결국 내 동굴이었다. 안이 너무 어두워 본인의 빛을 잃어간다고 했다. 벽을 쌓지 말고 빛을 내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를 꽁꽁 감추는 것뿐이었다. 그게 그를 지치게 했다. 떠나게 만들었다. 나의 벽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만들어왔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무너졌다.

그 만을 믿고 나온 갈대밭은 그새 내 키를 훌쩍 넘기게 커져가 돌아갈 수도 없었다. 황량한 대지에 동굴만이 남았다. 빛을 내기 위해 내가 돌아다닌 길들은 나를 헤매게 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를 밝혀주던 해는 따갑게 나를 해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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