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와요] 시리즈
통화를 마친 후, 나는 바로 엄마가 말씀하신 베지밀 구매 기록을 찾았다. 얼마 안 된 줄 알았는데, 작년 가을 간식으로 보냈던 기록이 남아있었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났구나.
시간은 참 빠르다. 특히 부모님과 관련된 시간은 더욱 그렇다. 어느새 엄마의 머리는 하얗게 세었고, 아빠는 치매 진단을 받으셨다.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온 그 시간들 사이로 부모님은 조금씩 늙어가고 계셨다.
베지밀과 함께 엄마가 좋아하는 치킨도 주문했다. 요즘 냉동 치킨이 잘 나와서 전자레인지나 에어프라이어로 데워 먹으면 아주 맛있다. 우리 아이들도 즐겨 먹는 간식이다.
시골에 계시다 보니 통닭을 사 드시려면 읍내까지 나가야 한다. 그렇다고 버스에 통닭을 들고 오기도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니어서, 자식들이 내려갈 때 몇 마리씩 사서 함께 먹는 게 전부다.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면 아빠가 읍내에서 통닭을 사오시곤 했다. 그때는 치킨이 정말 특별한 음식이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한 마리를 나눠 먹으며 웃고 떠들던 그 시간들.
지금 엄마에게 치킨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자식들과의 추억, 가족이 함께했던 따뜻한 시간들의 상징은 아닐까.
양념과 후라이드 합쳐서 네 봉지를 주문했다. 한 봉지 양이 많지 않아서 네 봉지는 되어야 아빠와 함께 맛있게 드실 수 있을 것이다.
'치킨 네 봉지'
겉으로 보면 그저 간단한 택배 주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전하고 싶은 수많은 마음들이 담겨 있었다.
'엄마, 혼자 힘들어하지 마세요.'
'멀리 있어서 직접 도와드리지 못해 미안해요.'
'그래도 제가 엄마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아빠와 함께 맛있게 드시면서 잠시라도 웃으셨으면 좋겠어요.'
현대 사회에서 '효도'의 의미는 많이 달라졌다. 예전처럼 부모님 곁에서 직접 모시는 것이 어려워진 시대. 대신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택배로 보내는 안부, 전화로 나누는 대화, 그리고 작은 선물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걸 '돈으로 때우는 효도'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치킨 네 봉지를 주문하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를. 엄마의 상황을 얼마나 세심하게 고려했는지를.
진정한 효도는 형태가 아니라 마음이다. 부모님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제공하려는 노력. 그것이 바로 현대적 효도의 모습이 아닐까.
주문을 완료하고 나서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베지밀이랑 치킨 보냈어요. 아빠랑 함께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힘들면 언제든 전화하세요."
곧 엄마에게서 답장이 왔다.
"고마워. 내가 돈을 줘야 하는데, 다음에 올때 줄께."
"됐어요. 이게 뭐라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보내는 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심이었고, 사랑이었고,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 모든 마음을 다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엄마만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프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온갖 고생을 다 하시고, 자식들 시집장가 다 보내놓고도 이제 남편 뒷바라지까지 해야 하시니 얼마나 힘든 삶을 사셨는지 옆에서 지켜본 나는 잘 안다.
그런 엄마가 지금부터라도 조금 더 편하게 살아가셨으면 좋겠다.
치킨 네 봉지로는 엄마의 모든 고생을 보상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 엄마가 웃으실 수 있다면. 아빠와 함께 맛있는 치킨을 드시며 잠시라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치킨 네 봉지 같은 작은 관심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담긴 진심이다.
앞으로도 나는 이런 식으로 엄마를 사랑할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언젠가 엄마에게 직접 말씀드리고 싶다.
"엄마, 늘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고 사랑합니다."
가장 가깝고도 먼 사람, 엄마.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고 있다.
치킨 네 봉지씩, 전화 한 통씩, 마음 한 조각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