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멸의 존재가 공부하는 사람으로 불멸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지식들도 어떤 것은 생성되고 어떤 것은 소멸되어서, 지식에 있어서도 동일한 사람으로 머물러 있는 때가 한시도 없다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가 지닌 개별 지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습이라고 불리는 것도 우리의 지식이 떠나가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죠. 망각은 지식이 떠나가는 것이고, 학습은 떠나가는 기억 대신에 새로운 기억을 다시 만들어내 지식을 보존함으로써, 마치 동일한 지식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니까요.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필멸의 존재는 바로 그런 방법을 통해서 자신을 보존합니다. 즉, 그들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모든 면에서 늘 동일한 존재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노쇠해서 떠나가는 것이 자신을 닮은 다른 새로운 것을 뒤에 남기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죠.
소크라테스여,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는, 몸이든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든 모두, 바로 그러한 기제를 통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에 참여합니다. 반면에,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는 그 방식이 다르지요. 그러니 모든 것이 본성적으로 자신이 낳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의아해할 필요가 없지요.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에게 그러한 에로스의 열정이 늘 따라다니는 것은 이렇듯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_현대 지성 클래식 28>,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이 책들을 인류의 유산으로 남겨준 플라톤에게 머리 숙여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학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앎에 대한 갈증은 누구에게도 똑같은 본능이라고 믿습니다. 적은 앎에도 기뻐하는 사람도 있고, 많은 앎에 통쾌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앎의 깊이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전문가로 부르기도 합니다.
인문학을 배우는 앎이란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이 적은 글에 나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에 참여하는 에로스의 열정입니다."
이 글을 되새겨 보세요. 감동의 봇물이 터져서 눈물이 나올 지경입니다. 너무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지식을 보전하려고 하는 노력, 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인문학에 있습니다.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다시 한번 새롭게 중장년이 되면서 깨닫게 됩니다. 학창 시절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배우는 것들과 자발적으로 배우는 인문학의 지식들은 앎의 깊이가 다릅니다.
인문학의 앎이란 깊이와 넓이 높이에만 있지 않습니다.
인문학에서 알려고 하는 궁극적인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있고 이는 모두 자기 자신이 우주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 깨달아가는 앎이어야 합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아주 중요한 점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지식들은 연결된다. 융합학문이 대세다. 그러므로 절대 편협한 지식을 섭취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작은 조각을 알게 되었다고 절대 교만해져서는 안됩니다.
조각조각 모여서 전체를 이루는 것을 우리는 진정한 본질을 알아내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장님이 코끼리의 몸통을 알아내기 위해서 다리부터 코, 몸통부터 꼬리까지 더듬어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좁은 편견 편협한 지식으로 인문학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공부에 대한 것이 학창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들의 공부에 대한 글들은 시험을 보라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을 닦고 높은 수준의 사람의 경지에 이르는 수양 - 인문학적인 공부를 이야기 한 것임을 이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인간이 비록 필멸에 이르지만,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하라고 하는 이 대목에서 크게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인류의 후대에게 전해지는 지식과 지혜의 유산을 만드는 무거운 책임을 수행하는 거룩한 일입니다. 죽는 날까지 인문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어버이날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어버이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버이의 자격이 있는지도 묻게 됩니다.
어른으로서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어머니,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겉모습만 번드르르한 것이 아니고, 자식들의 인생 멘토로서 죽기 전까지 열심히 공부한 어버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잘 산 것이 아닐까요! 끝까지 이생을 통해 인문학으로 성장하는 어버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