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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 May 01. 2024

01. 빨간딱지의 집

어렸을 때의 기억은 회색이었다.


사업에 실패한 본인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해 매일 술로 현실을 잊던 아빠, 그 아버지를 대신해서 일을 하느라 집에 항상 없었던 엄마, 그리고 텅 빈 집에서 혼자 커가야 했던 어린 시절의 나.

가끔 학교를 마친 후 집에 오면 멍하니 티비를 보던 엄마가 집에 있었다. 분명 낮에는 집에 안 계셔야 하는데 무슨 일일까? 일을 안 나가시고 집에 있는 게 반가워 기분이 좋아 방방 뛰면 엄마는 힘없이 나를 얼마간 바라보다가 바람을 쐬고 온다며 나가셨다. 그때서야 보였다. 우리 집 가구에 붙여져 있는 빨간딱지들이.


'압류표목'이니 '압류물 표시'이니 초등학생인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단어들이었지만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이 스티커가 보일 때마다 우울했다. 빨간딱지가 붙어 있을 때면 아빠는 이후로 몇 달간 들어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를 대신해 엄마는 가장노릇을 했다.

치킨 집, 국밥집, 화장품 방문 판매, 마사지사, 가정부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셨다. 하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아직도 인정 안 하고 계시지만 엄마는 사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그리 재능이 있진 않다. 

매일 새벽같이 나가서 새벽같이 어두운 밤에 들어오시다 보니 보살핌이 필요했던 어린 나는 혼자 커야 했다. 가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오라는 숙제를 받았을 때가 가장 난감했다. 부모님을 만나기 힘들기도 했지만 만나더라도 피곤에 지친 엄마에게 숙제장을 내밀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래서 엄마의 가계부와 아빠의 전화번호 수첩을 꺼내와 글씨체를 익혀 내가 대신 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캘리그래피에 재능을 키워왔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나를 안타깝게 여겨주셨다. 그래서 나나 부모님을 대신해 학교와 나라에 이것저것 물품을 지원받을 수 있는 방편을 알아봐 주셨다. 덕분에 매달 학용품 박스를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안에는 수채화 물감, 물통, 붓 같은 그림도구들도 들어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신한 수채화 물감 24색. 새 물감이 생겨 신난 기분으로 미술시간마다 그림을 마구 그려댔는데 내 그림을 빤히 보시던 담임선생님은 시에서 열리는 그리기 대회에 나가보지 않겠냐고 하셨다. 사실 그림 그리기는 나의 유일한 재능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회장소는 학교에서 꽤 먼 곳이었고 혼자 가기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기까지 데려다줄 부모님은 더더욱 없었다. 우리는 엄마가 하루 벌어온 돈으로 하루 먹고사는 가족이었다. 내 머릿속이 다 보였는지 선생님은 미술 선생님께 태워달라고 부탁해 놓을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  


그렇게 첫 교외 미술대회를 나가게 되었다.

점심까지만 먹고 미술 선생님 차를 타고 근교로 나가는 기분은 정말 이상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수업 중간에 대회를 갈 시간이 되었다고 나를 부르셨고 가방을 싸서 나가는 그 순간, 내가 특별한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대회가 열리는 공원에는 역시나 친구들과 혹은 부모님들과 함께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계단 한 구석에 홀로 앉아 그림을 그리기 작했다. 3시간이 어떻게 지나간지도 모른채 그림그리기에 몰두하다보니 얼굴이며 손이며 물감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내 능력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니!


그림을 제출하고 몇시간 뒤 수상작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동상 수상작에 내 이름이 불러졌다. '두두 학생 축하합니다. 앞으로 나오세요'라고 사회자가 얘기했는데도 너무 긴장해서 다리를 떨며 앞으로 나왔다. 내가 받은건 상장과 후원사의 마스코트 인형, 그리고 상금 10만원.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10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거금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내 조그만한 능력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되는구나, 엄마를 하루라도 쉴 수 있게 해줄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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