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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로움 May 20. 2020

당신과 함께하는 프라도 미술관여행

스페인 왕실의 계보를 알면 프라도 미술관여행이 한층 깊어진다.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회화 작품은 왕실 수집 작품들을 기초로 했기에 스페인 왕실의 계보를 어느 정도 아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기원전 1000년경 유럽 중부에서 이주한 켈트족이 모여 살던 곳은 기원전 2세기부터 약 600년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생겨난 기독교 왕국들은 711년 북아프리카에서 침입한 이슬람교도에 의해 멸망하고, 약 800년에 걸쳐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반도 중북부 지역에는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 카탈루냐 등의 기독교 왕국이 성립되었는데, 이들은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이슬람과 격렬히 투쟁했다.


카스티야의 공주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2세는 정략결혼을 통해 기독교 왕국들을 통합해 1492년 이슬람 왕국을 완전히 몰아낸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는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두 사람은 각자의 왕국을 다스리는 일종의 연합국 성격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다. 이 시기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각기 서유럽 열강의 후손들과 정략결혼을 하면서 스페인의 영토는 상대적으로 확장 일로를 달린다. 특히 공주 후안나는 오늘날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을 지배하던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펠리페 1세와 결혼하게되는데,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을 겸임 통치하게 된다.


카를로스1세는 중부와 동부 유럽 전역을 비롯해 오늘날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인근의 플랑드르 지역, 이탈리아 남부오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카를로스 1세는 특히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화가 티치아노를 흠모했는데, 그에게 자신의 임종을 지켜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스페인은 카를로스 1세 이후 1700년대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카를로스 1세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물려주고,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는 스페인의 왕위를 물려주었다.


펠리페 2세는 강력한 카톨릭 군주로 군림했다. 그는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이유로 스페인의 통치에 저항하는 플랑드르 지역에 알바 공작을 파견하여 무시무시한 살육을 감행해 그들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펠리페 2세는 첫 아내와 사별한 뒤, 영국 헨리 8세의 딸 메리 1세 '피의 메리' 프로테스탄트를 무자비하게 탄압해 얻은 별칭을 가진 메리 1세와 결혼해 영국과의 안정적인 관계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42년이라는 긴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신대륙의 식민지를 지배하면서도 네 차례나 파산 선고를 받을 정도로 재정적 적자에 시달렸다. 그는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스페인의 수도를 옮기고 20여 년간 새 왕궁을 지을 때 수많은 미술가들이 유럽 각지, 특히 이탈리아로부터 이주해와 스페인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아버지가 총애하던 티치아노에게 많은 작품을 의뢰하거나 수집하여 프라도의 티치아노 컬렉션을 풍부하게 했다.

펠리페 2세의 재위 시절에는 그리스에서 태어나 베네치아를 거쳐 톨레도로 이주해온 엘 그레코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순혈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해 카톨릭이 아닌 종교에 대한 심각한 적대감으로 심지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과 무어인조차 박해하는 바람에 많은 인재를 해외로 유출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내였던 영국의 여왕 메리 1세가 사망한 뒤 영국 왕위를 이은 엘리자베스 여왕과 해상에서 격돌하지만 대패하고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도 패하면서 국운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펠리페 2세의 아들 펠리페 3세는 스무 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한 나라를 통치하기엔 여러모로 유약했다. 그는 대부분의 국사를 자신이 신임하는 자들에게 위임함으로써, 궁정을 부패시켰다. 그는 아버지처럼 순혈정책을 추진해 거의 30만 명에 가까운 이슬람으로 개종한 스페인인 모리스코를 추방했는데, 이로 인해 스페인의 노동력이 거의 바닥날 정도였다. 그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이어지고 패색이 짙어지자 12년간의 휴전을 제안했다.


네덜란드와의 휴전 계약이 종료되는 1621년 펠리페 4세는 겨우 열여섯 살에 왕위에 올랐다. 그 역시 아버지 펠리페 3세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출신의 가스파르 데 구츠만에게 정치를 일임하였다. 펠리페 4세는 올리바레스(가스파르 데 구츠만)와 함께 스페인의 개혁을 도모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났고, 결국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하여 통치권을 상실하게 된다. 재위 시절 카탈루냐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바람에 극심한 내분을 겪었고, 일종의 연합국 성격으로 통치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잃는 등 국내외에서 정치적으로 무능한 왕이었다. 그러나 예술적 심미안이 높았던 그는 치세 중에 디에고 벨라스케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호세 데 리베라,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등 미술가를 비롯해 시인 로페 데 베가, 소설가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 데라바르카 등 유명 문인도 활동했다.

펠리페 4세는 무엇보다 미술품 수집에 광적인 모습을 보였다. 재임 시절에 플랑드르의 대가 루벤스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많은 걸작을 챙긴 그는 영국의 찰스 1세가 사망한 뒤 열린 유품 경매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알토란 같은 귀한 작품들을 스페인 왕실로 가지고 왔다. 또 왕실 화가였던 벨라스케스를 이탈리아로 보내 당시 미술 선진국이던 이탈리아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사 모으기도 했다.  


펠리페 4세의 아들 카를로스 2세는 아버지가 세상을 따나자 겨우 네 살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마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계속되어온 근친혼의 후유증을 앓은 듯 곱사등이에 발육부진을 겪었으며, 왕위를 계승할 적자마저 생산하지 못했다. 이런 저런 혈연관계를 내세워 호시탐탐 카를로스 2세 이후의 왕위계승에 눈독을 들이던 유럽의 여러 나라는 결국 큰 전쟁을 치르게 된다.

펠리페 4세는 첫 왕비인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마리아 테레사를 낳았다. 후사 없이 생을 마감한 병약한 왕 카를로스 2세는 펠리페 4세가 자신의 조카인 마리아나와 두 번째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었다.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인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와 결혼하는데, 이들사이의 손자가 바로 펠리페 5세로, 우여곡절 끝에 카를로스 2세의 뒤를 이어 스페인 왕인 셈이고, 펠리페 5세는 스페인에서의 부르봉 왕조의 시조가 된 셈이다.

펠리페5세는 할아버지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만만치 않아 스페인 각 지방이 들고 일어나 서로 스페인의 왕이 되겠다고 나서게 된다. 무려 12년간 지속된 전쟁 끝에 펠리페 5세는 가까스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국운은 이미 기울 만큼 기울었다.

폴랑드르는 독립해 스페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역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 또한 오스트리아에 뺏기게 된다. 펠리페 5세는 이제 아메리카 대륙에 남은 식민지와 스페인 본토만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한때 유럽 최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을 바닥에 내려놓아야만 했다. 그러나 펠리페 5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기우는 국운과는 상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위 중 마드리드 알카사르 궁에 불이 나 왕실 수집품의 3분의 1이 손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모으고 지켜낸 수많은 미술품들은 현재 프라도의 위상을 높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펠리페 5세의 뒤를 이은 페르난도 6세는 동성애자로 잡다한 사생활의 역사만 남긴 그가 그나마 미술사에서 언급되는 것은 본격적인 미술 기관이라 할수 있는 산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가 그의 재위시절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 뒤는 이복동생인 카를로스 3세와 그의 아들 카를로스 4세로 이어진다. 카를로스 3세는 후안 데 빌라누에바에게 마드리드 시민들의 주 산책로가 위치한 곳에 프라도의 전신인 자연사박물관과 더불어 산헤로니모교회를 설계하도록 했다.


한편 카를로스 4세는 재상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나랏일을 모조리 맡겼고, 심지어 자신의 왕비가 고도이와 놀아나는 것까지 묵인한 채 사냥에 몰두하는 등 무능력의 극치를 보였다. 아들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 국민들의 고도이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 아버지를 페위시켰지만 오히려 계락에 넘어가 왕권을 나폴레옹의 형에게 빼앗긴 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스페인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바로 그시절 고야는 <5월 2일>과 <5월 3일>을 제작했다.


호세 1세는 카를로스 3세 시절부터 짓기 시작한 프라도 미술관 건물을 병기 창고나 마구간으로 삼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조국 프랑스에 '나폴레옹 박물관' 현재 루브르박물관을 운영할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야는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로 시작하여 페르난도 7세 시절에도 활동했다.


프라도 미술관을 완공하고 개방한 페르난도 7세는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다시 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강압적인 통치는 분열을 야기하는데 크게 보면 철저한 왕정을 주장하는 보수파와 공화정이나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자유파의 대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뒤는 딸 이사벨 2세가 물려받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사벨 2세를 이용해 스페인의 개혁을 주도할 구상을 했지만, 페르난도 7세의 동생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 데 부르봉이 이끄는 보수파는 전쟁을 선포한다. 몇 차례의 쿠데타와 내란으로 이사벨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한 뒤에는 엉뚱하게도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아들 아마데오 1세라는 이탈리아 사부아 왕가 출신에게 왕위가 넘어가기도 했지만, 곧 폐위된다.


1873년 스페인은 의회 투표를 통해 공화제를 선택하고 첫 스페인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열 달 동안 대통령이 무려 네 번이나 바뀌며 무질서 그자체였다. 결국 스페인은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12세에 의해 다시 왕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입헌군주제를 실시해 스페인 근대사 중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그 평온의 시기는 12년만에 끝났다. 스페인 알폰소 13세를 거쳐 1931년 다시 제2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후 36년간 파시스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지배하에 놓였다가 프랑코가 죽기 전 지명한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1세가 입헌군주제 형식으로 즉위하면서 다시 브루봉 왕가를 재건했다. 그의 아들 펠리페 6세는 2014년 6월 스페인의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스페인 왕실 계보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스페인 왕실의 미술 사랑은 통치를 잘하건 못하건 지속되었다. 한때  전세계를 제패했던 스페인, 최근 경제 위기와 각 지역의 분리 독립 요구로 시끌벅적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 주춤하긴 하지만 세계적인 미술관을 언급할 때 늘 빠지지 않는 프라도 미술관은 스페인 왕실이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애장품들로 가득차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명실공히 12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미술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미술관으로 영원히 새로운 탄생을 거듭하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회화 작품은 왕실 수집 작품들을 기초로 했기때문에 스페인 왕실의 계보를 어느정도 알아야만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된 회화 작품들을 음미하고 감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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