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사모님이 되었습니다.
흥 [興]은 짧았고 망[亡]은 시작되었다.
일하던 중식당에서 만난 남편은 결혼 전 종로구의 한 동네에서 식당을 열었고 나 역시 결혼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의 식당에서 같이 일을 하게 되면서 자영업에 첫 발을 담갔다.
그렇게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나는 '사모님'이 되었다.
홀 직원들은 물론 배달하는 직원들까지 나보다 어린 사람은 없었고 대부분은 고모나 삼촌뻘의 나이셨다. 사모님이란 호칭을 상대가 부르는 것도 듣는 것도 어색할 정도로 나이차이 나는 어른들과 일을 하게 되었다.
지금 것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들 하고만 일을 하다 나이차이 많이 나는 '진짜 어른들'과 일을 하는 게 어려웠다. 오십 대 중반의 홀 매니저님과 둘이 있을 때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저 멀리 떨어져 핸드폰만 하고 꼭 필요한 질문이 아니면 말 걸지 않았다.
그때의 난 나랑 연령대가 많이 다르니 대화가 안 될 거라는 생각에 다가갈 생각을 안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직원들과 어울릴 줄도 소통할 줄도 모르는 20대 중반의 사모님일 뿐이었다.
첫 아이가 바로 생겨 아이만 키우다 내가 가게를 다시 나가게 된 건 가게 상황이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인수하였던 가게는 그 동네에서도 꽤 오래 운영하였던 곳으로 전부터 오던 단골손님들도 많았고 역 주변이라 유동인구도 많고 공공기관이랑 크고 작은 회사들이 즐비한 곳이라 점심시간이면 손님들이 2층 계단 밖까지 줄지어 기다렸으며 배달전화 3개가 끊임없이 울리도록 엄청나게 바빴던 곳이었다. 또한 객관적으로 봐도 남편의 요리 실력은 어딜 가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잘하여 오픈 후부터 손님들이 계속 늘고 있었다.
장사가 잘되는 것 같으니 우리는 쓰는 씀씀이도 커졌다. 그동안 고생하신 양가 어머니들에겐 감사의 의미로 몇백만 원짜리 외투를 사드리고 큰 애 백일엔 양가부모님 및 형제자매 식구들까지 초대해 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였다. 아이도 있으니 조금이라도 좋은 차로 타자고 제네시스까지 뽑고 둘째가 생겼을 땐 남들 다 가는 태교여행도 다녀왔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절약할 생각은 안 하고 쓰고 싶은데로 쓰고 살았다.
그땐 적은 금액으로 적금 넣는 것과 청약 말고는 아는 게 없어 모아둔 돈이 적었고 부동산 공부나 투자라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무식한 아줌마였다.
그렇게 장사가 잘되다 보니 남편은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 실패한 사업으로 빚이 좀 있었고 이 가게를 차리면서 개인회생을 통해 빚을 갚아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은행 대출이 어려우니 가게를 차리면서 주변에서 돈을 많이 빌렸는데 쌓여있는 빚을 청산하기보다 한 군데 가게를 더 내서 더 빨리,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했다. 두 군데 모두가 지금과 같이 장사가 잘 된다면 순식간에 빚도 갚고 더 좋은 집으로 이사도 갈 수 있다며 나를 설득했다. 사실 그때의 난 뭐가 뭔지도 잘 몰랐고 그저 남편의 말만 듣고 알아서 하겠지 뒷짐 지고 물러나 있었다.
그렇게 두 번째 가게를 연 곳은 파주의 어느 언덕배기 위 가게였는데 대로변도 아니고 찾아와야 알 수 있는 위치라 처음 봤을 때부터 내키지 않았다.
그곳에서 자리를 잡아보겠다고 서울의 가게는 후배에게만 맡겨두고 신경을 못썼더니 가게에선 점점 불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직원들끼리도 문제가 생기고 홀에서도 불친절하다고 컴플레인이 자주 나왔다. 파주 가게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고 빚은 점점 더 쌓여만 갔다. 결국 파주의 가게는 빚만 더 지게 만들고 문을 금방 닫게 되었다.
서울의 가게라도 다시 살려보자 하여 홀 직원들을 보내고 내가 홀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미 많이 떨어진 매출은 고사하고 직원들이 얼마나 불친절하게 했던지 이미지도 나빠진 상황이었다.
둘째가 이제 막 3살, 엄마 손길이 많이 필요할 때였지만 친정 엄마에게 두 아들을 맡기고 일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였지만 우리 가게는 감당이 안될 정도로 재정상태가 나빠지고 있었고 거기에 코로나까지 찾아왔다.
그래서 처음엔 차부터 팔았다.
제네시스 G330, 차에 관심도 없던 나는 그 차가 그렇게 저렴한 차가 아니라는 것도 몰랐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하면서도 핸들 앞에 앉아 핸들만 만지작 거리던 남편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그렇게 차를 팔았지만 주방직원의 급여 몇 달 치를 주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작은 빌라였지만 많은 추억이 있던 신혼집 마저 헐값에 팔고 친정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도 빚은 메꿔지지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빚독촉 전화까지 받아보았다. 눈물이 맺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죄송하다고 하였다. 열심히 해보려고 하였지만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재료비는 점점 쌓여만 갔고 벌어서 이걸 갚으면 다음 빚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돌려가며 빚을 갚는 악순환을 버티고 있을 때 건물주가 바뀌면서 나가 줄 것을 요청받았다. 몇 달 치 밀린 월세, 직원들 급여, 원상복구까지 할 경우 보증금은 남는 게 없었다. 그나마 우리 건물 1층의 부동산 사장님이 딱한 사정을 전하며 건물주를 설득하여 원상복구 없이 남은 보증금을 받고 나왔다. 그 돈으로 직원들 급여를 주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6년을 영업하였던 그곳을 우린 그렇게 급하게 떠나게 되었다. 남은 건 잔뜩 쌓인 빚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만 31살이었다. 이제 막 30대로 진입한 나는 애가 둘이었고 집도 없이 가진 건 빚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린 시절 어렵게 자라온 내공이 쌓여 그런가 빚 따윈 지금부터 벌어서 갚으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만 내가 가장 속상하고 마음 아팠던 건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직 어리기만 한 우리 아이들 옆에 있어주지도 못하고 다른 친구들만치 해주지 못하는 게 많은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친정엄마에게도 대못을 박았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 다는데 자신 때문에 내가 이런 삶을 사는 건 아닌가 싶다며 마음 아파하는 모습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완전히 망하고 나서야 남편의 빚이 각종 밀린 공과금과 세금, 주변 지인들에게 빌린 돈까지 합쳐서 몇억이나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편은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울었다. 미안하다고.
하지만 아직 어려서 그랬던 건지 어쩌면 흔들리는 우리 가게를 보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건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더 이상은 남편이 나에게 숨기는 게 없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힘든 건 이겨낼 수 있지만 믿음이 깨지면 난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고. 그렇게 실상을 처음으로 마주한 날 우리 둘은 부부에서 동지가 되었다. 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나 아이들을 지켜야 할 동지.
나는 당장 일할 곳을 찾기 시작하였고 남편도 주변 지인들의 식당에 일당을 다니며 앞으로 살아갈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고생은 이제부터구나,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라고 다짐했다. 내 앞엔 아직 어린이집에 다니는 어린 두 아들이 있었기에 무너졌다고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기회가 왔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두 아들과의 생이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잠시 아이들과 떨어져 살게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