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잘 하는 아이는 칭찬받는 아이

잘 받은 성적표는 열쇠인가, 또 다른 속박의 시작인가.

by HeySu


초등학교 3학년 내 짝꿍은 좋은 냄새가 나고 얼굴이 이쁘장했던 모범생 아이였다. 반장을 맡았던 그 친구는, 자기와 달리 꾀죄죄해 보였을 내게 어떤 선입견도 없이 마음을 먼저 내주었었다. 말수도 적고 이래저래 존재감이 전무했던 나는 항상 다정하고 친절한 내 짝꿍이 정말 좋았다.

여전히 고마움으로 기억하는 그 친구 이름은 ‘정순’이다. 유난히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는데 아쉽게도 그 친구의 소식을 지금은 전혀 알지 못한다. 워낙 똑부러지고 고운 심성의 아이였던지라 그 성품이면 분명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리라.

정순이는 공부에 문외한이었던 나를 돕고 싶었나 보다. 쉬는 시간이 되면 엉덩이가 날아가듯 떨어지는 게 당연한 초등 저학년인데도, 정순이는 쉬는 시간 십분의 시간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지금 세대는 초등 6년 내내 성적 순위를 매기는 정기시험이 없지만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시험과 함께하는 인생이었다. 어떻게 시험 대비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교과서를 어떻게 읽고 정리하는지도 몰랐던 나를, 정순이는 어떤 빈정거림도 없이 늘 선한 눈매를 한 채 도와주고 싶어 했다.

처음에 정순이가 선택한 것은 몇 문제의 답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책가방으로 책상 가운데 가림판을 세워두고 치르던 시험 날, 정순이는 답을 적은 고무지우개를 슬쩍 옆으로 넘기듯 보내왔다. 쓱쓱 내 오답들을 지우고 몇 개 받아 적다 보니 나는 그 시험에서 이전보다 훨씬 오른 성적을 받았다.

선생님도 수상쩍었던지 나를 교탁 옆 본인 책상 앞으로 살짝 따로 불러내 물으셨고, 놀란 나는 당황한 얼굴로 발뺌했다. 당시에는 촌지가 오고 가는 게 당연했고, 공부 잘하고 멀끔하니 부모가 많은 신경을 쓰는 티가 나는 아이들은 선생님의 이쁨을 대놓고 받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반장 정순이라면 선생님께 신뢰받고 이쁨받는 게 마땅한 거라고 생각할 만큼 그 애가 좋았다.

선생님이 만든 삼자대면 자리에서 정순이는 “아니에요, 얘, 진짜로 저랑 같이 공부했어요.” 하고 말해주었다. 나의 불온했던 시험은 그렇게 무마되었지만, 나는 그때 받았던 성적표로 집에서 생전 처음 엄청난 칭찬받았다. 엄마 아빠가 아주 환히 웃었다. 맛있는 간식도 상으로 사주셨던 것 같기도 하다.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받아온 통지표였지만, 그때 받았던 칭찬은 내 속에 불꽃이 일게 했다.

늘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보는 엄마의 눈총이 따갑고 아팠는데, “칭찬을 받았다.”

무서운 엄마가 웃어주었다.

그날 이후 정순이는 본인의 공부 방법을 나에게 하나하나 가르쳤다. 밑줄 긋고 핵심 단어에 괄호나 동그라미를 치는 등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그리고 암기한 내용을 서로 체크해 주는 파트너가 되었다. 공부하는 게 재미있다는 걸 느낀 날들이었다. 방법을 아니 공부가 절로 됐다. 집에 와서도 공부했다. 시험 대비라는 것을 처음으로 해보았던 것 같다. 집에서는 언니들도 엄마도... 아무도 이런 걸 내게 알려주지 않았었다.

바로 다음 시험부터 난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친구들로부터 인기도 생기고 선생님의 신뢰도 받았다. 반장도 되었고 여러 학교행사에 참가하는 대표도 되었다.

무엇보다도 엄마, 아빠가 좋아하셨고 날 대하는 엄마의 온도가 달라졌다. 혼나는 일도 부쩍 줄었다.

나는 친척들과 집에 찾아오는 엄마 손님들에게 ‘공부 잘하고, 말도 젤 잘 듣고, 자기 할 일도 혼자 알아서 하는, 걔 중 젤 착한 아이‘로 소개되었다.

나는 그렇게 내 깜냥에 최선을 다해 ’별 보고 등교하고 별 보고 하교‘하는 중, 고등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정신분석가 박우란 박사는 “엄마의 말과 엄마의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엄마의 말들이 유년기의 초기 불안을 진화하고 안정적인 정신 구조로 진입하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저서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던 나의 불안들이, 낮은 자존감이, 늘 울상이었던 얼굴과 혼자인 것 같았던 오랜 세월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엄마가 던진 걸레에 얼굴을 맞았던 어느 날, 별거 아닌 일에 머리 쥐어박혔던 어느 날, 다쳐와도 걱정 아닌 핀잔을 들어야 했던 어느 날, 혼나고 울면 그래서 한두 대 더 맞았던 ’모든 어느 날‘에도.

나는 엄마가 짓는 표정의 미세한 얼굴 근육 하나하나에서, 시리게 차가운 눈빛에서, 엄마의 언어를 알아챘다.

칭찬받는 게 좋아서 모범생이 되고, '착한 아이'로 살았던 나는 마흔다섯에 드디어, '나쁜 아이'로 엄마 아빠에게 속살 드러난 미운 마음을 치열하게 드러낸다. 또 자책하고 괴로워하길 반복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해방감도 느끼며 나는 그렇게 부지런히 내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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