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스민 터널 끝을 향하여
어린아이는 자생할 수 없는 환경에서 한없이 무력하다.
당연하고 정당한 표현을 하는 것조차 남들에겐 필요 없을 '용기'가 필요한 일이어야 하는 아이도 있다.
표현하지 못한 아이들이 죽어간다.
웃지 못한 아이들이 울음도 잃어간다.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다 보면 마음 다쳐 아픈 아이들이 곳곳에 얼마나 넘쳐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자꾸자꾸 늘어가는 그 수에 놀라게 된다. 세상이 일부러 보려 하지 않고 알려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마음이 저릿하다.
'내 잘못이고 내가 죄인이었다'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다움을 잃은 '덩어리생물' 들.
도대체 이 세상 곳곳에는 크고 작은 지옥들이 왜 이토록 많이도 존재하는가.
돌이켜보니 작은 어린아이였던 내게 마음 온전히 내어준 어른 한 사람이 없었다.
감정을 돌아봐 준 어느 한 사람이 없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어린 나에게 자주자주 찾아가 말해줄 텐데.
'많이 외롭겠다'고,' 많이 힘들지'라고 토닥여줄 텐데. '좋은 어른'이 되어 줄 수 있을 텐데...
내 유년기의 모든 것이 불행뿐이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여행을 가다 보면 산자락을 통과하는 긴 터널구간을 만나게 된다. 언제 끝나나 싶은 터널을 지나다보면, 터널을 빠져나와 다른 터널로 들어가는 잠시 잠깐의 빛 구간이 존재한다.
나의 유년기도 그랬다. 잘 흐르지 않는 길고 긴 시간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터널과 바깥 구간을 넘나들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모든 유년의 기억이 어둠뿐이었다면 과연 살 수 있었을까? 그래도 좋았던 순간도 있었더랬다고, 그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싶진 않았을까.
결혼을 해서 집을 나오게 될 때까지 집에 '가족'끼리 있는 순간들이 불편하고 어려웠었다. 부모님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지면 숨이 턱 막히고 바짝 긴장이 됬다. 오늘은 말다툼에서 어디까지 갈까 하는 걱정과 짜증 어린 마음으로 그 시간을 견뎌냈다. 부모님의 싸움이 끝나고 정적이 감돌 때는 불행의 그림자가 몸을 칭칭 휘감은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혹여나 그 어색한 공기가 맴돌 때는 정말이지 되돌아나가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때론 엉망진창으로 내가 망가져 버리고 말까 하는 생각도 더러 들곤 했지만, 그때도 그건 날 위해서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부끄러웠던 나의 환경이 나 자신에게 '부끄러움'의 감정을 물려주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난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깎아내렸다. '나의 모자람'만을 굳이 하나하나 발견해가면서 부끄러움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두운 마음과 웃지 않는 얼굴은 불청객을 끌어들인다.
길을 걸으면 '도를 아십니까' 일행들이 들러붙었다.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내가 하필 눈에 띄었을까 , 이것도 결국 내가 문제이기 때문이란 생각으로 자책했다.
세상 다 산 것 같은 우울함과 공허함을 나도 모르게 '질질' 흘리고 다니는 게 아닐까, 내 몸 윤곽을 따라 먹구름 같은 잿빛이 휘돌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는 그녀의 저서 < 부끄러움> 의 첫 장에서 어느 6월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싸움의 현장을 목도했다. 그날의 일은 그녀의 기억 속에 그대로 박제되었다. 언제나 '정확하고 명확하게' 연도와 날짜는 물론 그날의 공기 흐름까지 떠올랐다고했다.
무지막지한 다툼 끝에 아버지가 울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넌 왜 울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되풀이하며 말하는 아버지에게 그녀가 대꾸했다.
"아빠가 내 불행을 벌어놓은 거야!"
'불행을 벌어놓는다'는 표현은 공포스러운 일을 겪은 후 영원히 미치거나 불행해진다는 뜻의 노르망디 사투리이다.
아니 에르노가 아버지에게 던지듯 내뱉은 그 말을, 나도 진작에 내뱉었어야 했다.
수도 없이 반복해서 봐왔던 부모의 싸움, 폭언과 욕설, 귀를 틀어막고픈 고성이 난무하는 말다툼을 비롯해 몸에까지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을 지켜봐야했던 어린아이의 공포와 무기력함. 그 기억은 지우려야 지울수가 없다.
나의 엄마, 나의 아빠도 참으로 많이 '불행을 벌어놓아'다 주셨다.
덕분에 마음은 늘 어둠 속에 머물렀다.
내게 글을 쓰는 일은, 이제 그만 어둠을 빠져나오고 싶은 의지의 표명이자 치료 수단이다.
수 없이 망설이고 수년 간 미뤄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어 정리하기 시작한 지 겨우 한 달 남짓이다.
두서없던 미움의 감정들을 차례차례 꺼내어 빙빙 둘러본다.
'글로 쓰는 말'로 마음을 털어내는 일은 숨을 쉬는 일이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어두운 마음 터널에서 불을 켜는 일이다.
색채라곤 없던 어둠 속 한 구석에 보이지 않았던 웅크린 내면 아이를 발견해, 나가야 할 길을 비추어 안내하는 일, 그것이 나의 글쓰기다.
언젠가 이야기의 끝에 다다를 날이 온다면, 길고 길었던 터널 끝의 경계에서 나의 불안과 초조,예민함들도 몽땅 내려놓아졌으면 좋겠다.
꽁꽁 싸맨 마음 널널하게 풀어헤치고, 후덕하리만큼 좀 넉넉해진 나를 보는 것.
끝이 그리 멀지 않았기를 바라며 쓰고 또 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순수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다. 어느 다른 사람의 말도 아닌 자신의 소리이다.
그러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 깊숙이 숨겨진 고통과의 대면일 수도 있고, 치유의 시간일 수 있으며
부끄러운 자기만의 언어일 수도 있다.
-- <최경규의 행복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