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때에 적절한 순서로 욕구들이 충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존적인 욕구들이 충분히 채워지지 못했을 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받은 아이를 내면에 지닌 채로 어른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 그대로 아이로서 그 욕구들을 채우려고 매달릴 것이다.
이 정서적으로 굶주린 아이가 바로 당신을 미성숙하게 만들고, 당신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겪고 있는 '유해한 결과'들은 슬퍼했어야만 했던 것들에 슬퍼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해결되지 못한 감정들과 억압된 욕구들 때문에 '표현 되었어야 할 감정'들이 왜곡된 채로 균열이 가득한 '나'로부터, 어느 순간 불쑥 새어나오고야 마는 것이리라.
'의존'이 당연한 시기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경험을 반복해 겪고 나면 정서적으로 매우 굶주린 상태가 된다. 이 정서적인 기아 상태는 사라지지 않고 유년기, 청소년기, 성년기를 거쳐가며 그 허기를 더해간다. 이러한 허기짐은 연애를 비롯해 사람과의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이어감에 있어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한 때 내 별명은 '사랑바라기'였다.
원 가정으로부터 특별한 관심이나 애정을 받고 자라지 못한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놀라운 감정의 증폭을 경험했다.
훨씬 넓어진 세상을 만나고, 더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관심을 받게 되는 일이 좋았다. 관심들 하나하나가 다 좋아서 거절하는 방법을 몰랐다. 의도치 않게 상처 주는 일도 생기고 상처 받는 일도 많아졌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게, 애정을 받는다는게 어떤 느낌인지 많이도 배웠던 시절이었다.
'사랑바라기'는 회사의 과장님이 지어주신 것이었는데, 내가 얼마나 미성숙했는지 얼마나 어리숙한 애송이었는지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어른들에게 관심과 사랑받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조금 덜 자라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선배들의 관심을 받고 챙김을 받는 일은 많이 좋았다. 정서적으로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는 일이 많았다. 굳이 챙길 필요가 없는 일들도 스스럼없이 해 가며, 그런 챙김을 행하는 '행위'조차 나는 행복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동료와 선배가 생일을 챙겨주고 팀 파티를 해 주는 것도 좋았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특별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정서적 '허기'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남을 오해하는 일이 늘기도 하고, 그럼으로 인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결과를 낳기도 했었다. 누가 날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로 번진 '사랑바라기'는 결국 우려될만한 병적증상인 피해망상증으로 변모했고, 나는 다시금 심각히 괴로워졌다.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 감정에 휩싸이고, 업무시간에 들리는 자판소리가 나를 헐뜯기 위해 오가는 채팅이란 망상과 더불어 타인의 행동들은 나를 향한 공격으로만 느껴지는 시점까지 이르렀다.
온 정신이 '그것' 에 쏠려 있었고 그런 내 마음이 괴로워 다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일곤 했다.
그게 나의 내면아이로부터 오는 병적인 증상이었다는 걸 안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서였다.
존 브래드 쇼는 내면아이의 상처 치유를 위한 선제적 과제로 '아이였을 때 제대로 채워지지 못한 욕구들을 이애하고 그 상실을 슬퍼하는 것'을 꼽았다.
이 애도의 과정이 온전하게 이뤄질 때까지, 내면아이는 만족할 줄 모르고 어린 시절에 받지 못했던 사랑이나 가치 등을 찾아 끝도 없이 헤매게 될 것이라고 했다.
몸만 성인인 내면아이의 자기 중심적이고 싶은 '욕구' 들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망하고 좌절을 경험하는 일이 많다 .
-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 줄 수 있는 완벽한 사랑의 대상을 찾고 헤맨다.
-물건이나 돈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상받으려 한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에서의 욕구들이 지금은 제대로 채워지고는 있는걸까?
날카로움으로 기억되는 차가운 엄마와 안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외면했던 아빠, 각자 도생하기 바빠 서로 애틋할 수 없었던 자매들.
'함께'의 모습으로 살면서 '따로' 살았던 가족에서 나는, 지금의 시점에서 그때의 결핍과 상실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마음에서 들리는 내면아이의 허기진 목소리를 들어줄 깜냥을 갖추게는 된 것일까?
내가 나의 내면아이를 방치해 왔다면, 그 안을 들여다보는게 창에 몸 안쪽이 찔리듯 아플지라도 내면아이와 접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정한 순간마다 쓰나미 몰려오듯 한꺼번에 솟구치는 분노와 슬픔, 좌절, 불안, 절망 등의 감정들을 튼튼한 기둥 하나 단단히 부여잡고 견뎌내봐야겠다.
이 시기는 주기적으로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 파도의 크기는 분명 상쇄되고 작아져 갈 것이라 믿는다.
나의 내면아이가, 앞으로 반응하고 싶은 대로 결핍에 반응하고 충분히 스스로를 애도하는 시간을 갖고 건강한 방식으로 결핍을 채워가는 것을 허락하겠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겠다.
단단하게 채워놓은 마음의 빗장을 이제 느슨하게 풀어줘도 되는 때가 왔다고 일러주겠다.
이름 불러주지 못한 나의 내면아이의 울리는 외침에 충분히 큰 소리로 화답하겠다.
이제 마흔 여섯이 된 나는 나의 내면아이에게 '새로운 허락'을 내리는 것이다.
무의식 저 아래의 푹 삭은 미움과 분노를 꺼내어, 나는 오늘도 엄마 아빠를 미워하겠다.
'엄마'였던 사람과 '아빠'였던 그 때의 그 사람들에게 고하겠다. 원망하고 미워했노라고. 좌절했노라고. 절망했노라고.
난 늘 내 절망에 앞서 엄마의 사연과 아빠의 사연을 헤아렸다. '이러이러해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거야, 나한테 화풀이할 수 밖에 없는 감정이었을꺼야' 하고.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당하는 이유를 당췌 납득할 수 없었을테고 더 마음이 고통으로 가득찰 거란걸 본능적으로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먼저 헤아리지 않겠다. 그 때의 '당신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지금의 '당신들'의 사정을 헤아리다 더 이상 이전처럼 정작 '나를 헤아리지 못하는 일'은 그만하라고 허락하겠다.
2023년 3월 31일.
나의 마흔 여섯 생일에,
나의 사랑하는 내면아이에게 "새로운 허락"을 선물한다.
나를 안아주기를,
따뜻한 말로 날 사랑해주기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날 바라봐주기를
남들의 잣대로 날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믿어주기를.
굉장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애타는 마음으로
포기한 척하지만 희망끈을 놓지않는 마음으로.
부모는 아이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당신의 신은 어떠한 모습이었나요?
나의 힘이 부모에 의해 정의되어집니다.
나의 세상이 부모로 인해 정의되어집니다.
나의 존재가 부모에 의해 정의되어집니다.
부모가 날 함부로 대하면 나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부모가 날 사랑하면 나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신과 같습니다.
< 블로그_ OH.감사 님 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