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서른 후반 즈음에
서른, 아홉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요즘 해 질 녘쯤 한참 동안 티비 채널을 올리다 보면 방영되고 있다.
손예진배우와 내가 좋아하는 채송화 선생님이 나오는 드라마다.
(전미도가 본명인지 채송화가 본명인지 매번 헷갈린다.)
각자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서른아홉, 미혼, 여자친구들의 이야기인데
친엄마가 감옥에 있지만, 좋은 양부모와 끝내주는 언니, 피부과 의사에, 부자 의사 남친에, 세상 제일 예쁜 미모까지 가진 손예진언니,
연기선생님이자, 사연 많은 불륜녀에, 금슬 좋은 부모님이 계신 시한부 환자 채송화선생님,
그리고 백화점 화장품 매장 매니저였다가 진상손님에게 명찰 집어던지고 때려친 겁나 멋진 주희언니까지.
오늘 회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시한부 채송화 선생님이 원래는 빨래방에 있는 시간이 너무 싫어서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셨는데 지금은 빨래방에 있는 시간도 너무 좋다고 말하고 펑펑 우는 장면이었다.
뭐든,
끝이 있거나, 잃어보거나, 그래야 소중함을 아나보다.
지난 2024년, 1년간 글을 쓰지 못했다.
내 생일, 3월이 되기 전, 나는 서른다섯이었다.
대통령의 정책으로 서른일곱이었다가 갑자기 서른다섯이 된 나는 늘 내가 상상하던 그,
'나이를 거슬러 다시 그 나이가 된다면'의 실사판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서른일곱의 나에게 물어보았다.
-너, 다시 서른다섯이 되면 뭐 할래?
나는 대답했다.
-알바 때려치우고, 내 사업 한번 해볼래.
서른다섯이라는 나이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6년을 꽉 채워 다녔던 나의 알바를 끝냈다.
그래, 서른일곱이면 몰라도 서른다섯은 할 수 있지!
어쩌다 보니 줄을 섰다가, 잠깐 사이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서 빠져나가지도 못한 채
올라타게 된 급류 타기 후룸라이드처럼
그렇게 나는 급류에 휩쓸렸다.
(그 당시엔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졌던) 내 생일이 마감 날짜였던 창업 지원 프로그램에서
1차 서류, 2차 면접, 3차 PPT 발표 후, 2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지원받게 되어
사업자를 내고, 사업장을 꾸미고,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업구상, 임대, 사업장인테리어, 사업진행, 홍보, 그 모든 것을 혼자 9개월 정도만에 해냈다.
작지만 수익도 내서 올해 부가세 신고도 했다.
쉼 없이 2024년을 달리고 2025년이 되어 아이가 방학을 했다.
올해 1월 들어 하루 빼고 집에서 꼬박 놀고 있는 중이다.
연말, 연시 나라가 시끄러웠다가, 슬펐다가, 이래 저래 뭔가 기운도 빠지고
계획했던 일도 끝나고 해서 일을 하고 있지 않다.
사실 놀지는 않는다.
빨래, 설거지, 아침, 점심, 저녁 밥하기, 장보기, 청소는 매일 하는 일.
틈틈이 아이방 책 재배치, 화장실 청소, 아이 공부시키고 학습지 매겨주기
독감 걸린 아이 케어하기, 구내염 걸린 아이 케어하기, 이른 저녁 먹으러 오는 남편 밥 차려주기,
다음 달부터 다시 시작할 일 구상하고 홍보하기.
가정주부가 할 일은 다 한다.
정말 웃긴 게, 평소에 그렇게 하기 싫던 집안일이 너무 재미있다
다른 할 일이 있는데 안 하고 집안일을 하니 이게 재미있다
매번 하루 죙일 하던 일이 그렇게 빨리 끝이 난다.
냉장고는 결혼 10년 만에 전에 없이 깨끗하고
청소기밀고 스팀 걸레질까지 한 덕에 바닥도 빤딱빤딱, 맨질맨질하다
소파도 깔끔, 빨래도 밀리지 않는다.
커피도 안 사 먹고 매일 내려먹는다. 집에 커피냄새가 향긋하다.
핸드폰도 덜 본다.
책도 보고, 티비도 보고, 바쁘다.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다는 걸 서른일곱인 그때 알았더라면
나는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사람은
항상 뭔가를 해봐야 하나보다.
서른일곱이었던 나도,
서른다섯에서 여섯이 된 나도,
난 여전히 섣부르고
여전히 서투르고
여전히 내 나이에 맞는 삶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