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동길 Nov 01. 2020

샤인

《샤인》(Shine), 1996년.

감독: 스콧 힉스

제작: 파인 라인

각본: 잔 사디          


# 천재와 아버지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아버지의 과도한 집착과 잘못된 교육 방법 때문에 정신병에 걸렸던 호주 출신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데이비드는 엄격하고 독선적인 아버지 피터로부터 엄격한 음악 교육을 받습니다. 데이비드가 음악 교육을 받게 된 것도 결국 아버지의 트라우마 때문인데요.     

아버지 피터는 어린 시절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었는데, 아버지 피터의 좌절될 꿈은 아들에게 투사되어 아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음악가로 키우려고 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아버지 피터는 아들에게 1등이 되는 것만을 강요합니다.     


문제는 아버지 피터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받은 트라우마로 인해 아들 데이비드에 대한 사랑의 방법과 교육이 비정상적인 집착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피터의 트라우마는 결국은 아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데이비드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으로부터 미국 유학 제의를 받게 되는데요. 정작 피터는 데이비드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을 반대합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크게 싸우게 되고 데이비드는 홀로 영국 왕립음악원에 입학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나게 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전환됩니다.     


데이비드의 실력은 눈에 띄게 발전하고 마침내 콩쿠르에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데이비드가 선택한 연주곡은 하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데이비드의 손에서 연주되기를 원했던 곡이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 3번은... 불멸의 곡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이 곡을 연주할 수는 없네!"

"저는 충분히 미쳤어요."     


데이비드의 몸은 아버지의 곁을 벗어났지만, 그의 정신과 영혼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아버지 피터였던 것이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데이비드를 여전히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부터 비롯되었던 트라우마였습니다. 결국 데이비드는 연주를 완전히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잃고 쓰러집니다. 이후 정신분열증을 앓게 된 그는 가족들로부터도 외면받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 트라우마의 대물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강력한 아버지 존재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존재였습니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존재 이유가 다르듯, 아버지라는 존재와 이름표는 자녀들에게 어머니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데요. 아버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가족 중에서 가장 큰 권력과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호자라는 이름표가 자칫 가족을 구속하고 압박할 수 있는 심리적 감옥로 변질된 극단적인 경우를 종종 마주하게 되는데요. 이런 관점에서 영화 샤인은 '독이 된 사랑의 집착'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과 그 구성원을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할 수 있다'는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망상과 착각은 가족에게 얼마나 엄청나고 부정적인 트라우마를 대물림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샤인'은 말하고 있지요.     


엄격하고 독선적인 아버지 피터는 아들이 잘해도 야단을 치고 못하면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았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대물림된 트라우마는 결국 '애정'과 '교육'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아버지가 그럴수록 데이비드의 심리적 역학은 그 존재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하겠지요. 당연한 '심리적 역학'입니다. 잡으려 하면 도망가는 게 모든 피조물의 본능이니까요.     


# 트라우마가 낳은 사생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이름은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누가 그 이름을 어떻게 불러주었는가이지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가해자와 무기력한 피해자 사이의 '심리적 역학'은 결국 또 다른 트라우마를 낳을 수밖에 없지요. 가정에서 절대적인 힘과 권력으로 무장한 이의 한마디는 자녀들의 성장에 걸림돌보다 더 큰 좌절과 절망감을 주는 저주로 남겨질 수도 있겠지요.     


"넌 본질부터 게으르고 나쁜 아이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면 정말 몹쓸 아이이니 벌을 받을 것이다."     


거절할 수 없는 부정적인 암시가 가져다주는 선물은 저주와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절대 권력자 같은 존재가 던지는 메시지는 자녀들에게 그야말로 저주이지요. 가족들에 의해 반복되는 부정적 암시는 자녀들에게 세뇌되고 각인되어 그들이 앞으로 마주하는 세상을 편안하고 안락한 곳, 참으로 살아볼 만한 이곳으로 작용할 수 없게 되겠지요. 그들이 희망적인 관계상은 이미 먹칠이 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 선택적 자기 보호 본능: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정신적으로 독립한 자아. 홀로 설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는 말의 뜻은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으로 불릴 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고 '꾸미지 않아도' 존중받을 수 있으며, '과거의 상처까지'도 사랑받을 수 있다면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존재도 제 빛깔과 향기를 있는 그대로 발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창이나 방패를 들지 않고도 언제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요?     


가족을 지켜주고 수호해 주는 존재. 나를 보호해주는 존재로부터 저주의 언어를 배운 자아는 브레이크 밟는 법을 모를 수 있고 오히려 브레이크와 액셀을 혼동할 때도 있지요. 극심한 두려움에 자주 노출된 정신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을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자기인지 타인이지 식별할 수 없는 것이지요.     


생존의 문제 앞에서 적과 아군을 식별하지 못할 때 그의 정신은 살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정신줄을 놓아버릴 때가 있는데요. 부정적 자기 암시에 시달리던 데이비드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고 난 후 쓰러진 이유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정신이 선택한 '자기 보호본능'이었습니다.     


# '샤인' 이름표를 바꾸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지금 가족을 떠난다면 영원히 너는 우리 가족이 아니다."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와 억압과 구속, 잘못된 사랑의 집착과 협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로 마음먹은 어느 날, 데이비드는 '헬프갓' 대신 '샤인'이라는 새로운 성을 가진 이름표를 달지요. 부정적 암시로 가득한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처럼.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어 합니다. 너는 나에게 또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에게로 가서 있는 그대로 자기가 되고 싶어 합니다. 때로는 감추어두었던 감정을 내비치며 화를 내거나 투정을 해도 용인해 주고받아줄 수 있는 든든한 어깨를 필요로 합니다.     


# 가족과 부모의 의미: 자녀가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는 그 이름. 그 울타리는 가족입니다.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곳. 내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주었던 곳도 가족입니다. 부모의 울타리이지요. 부모라는 이름은 분명 자녀에게 죽을 때까지 든든한 정신적 지주이자 버팀목입니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가족이나 개인은 삶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부정적이거나 신념 상실을 상실하게 되고 허무주의적이며 냉소적인 삶의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요.     


- 가족은 가장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입니다. 가족에 의한 트라우마는 복수심과 수용심을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즉 브레이크와 액셀레이터를 분별할 줄 모르는 '어른 아이'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사랑이 머무는 가족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공동체보다도 더 많은 노력과 감정조절이 필요하고 감정의 여과 장치가 필요한 곳이 가정입니다.     


- 특히 자녀들과 건강한 가족관계를 위한 노력으로 그 무엇보다도 합리적 기대치가 요구되지요. 영화 샤인은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비합리적인 기대와 막무가내식 교육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사랑. 특히 가족 간의 사랑은 보상이나 대가, 성과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조건 없는 사랑이 필요하지요. "나를 바꾸려 하지 말고 가족만이라도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주세요. 언제든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 허물없이 알몸으로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면, 반대로 그 경계가 너무도 쉽고 자연스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관계도 또한 가족이지요. 특히 가족끼리는 함부로 말할 때가 있는데, 그러나 가족끼리도 해서는 안 될 말과 피해야 하는 행동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가족은 서로 행복하게 성장하게 되는데요.     


특히 지속적으로 우울하고 만성적으로 자살을 생각하는 부모 밑에서 양육된 자녀는 자기감정조절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지나치게 자기감정을 억제하다가 어느 순간 강한 분노감을 폭발시킬 때가 있지요. 이성이 자기 통제력을 잃었을 때, 부모로부터 학습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데, 심하면 자기 학대와 비극적인 행동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가족은 소유물이 아니지요. 특히 자녀도 한 명의 인격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서로의 경계선 지키기'입니다   

  

- 가족이지만 정신적인 독립과 이별은 필수입니다. 가족이란 구심점을 갖는 한 원과 한 원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원과 원의 만남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구나 가족에게서 한 인격체의 권리를 가장 편안하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특히 자녀들은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바탕에 불안이나 두려움이 자리할 수 없는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겠지요.     


참조: 김준기,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시그마북스, 2020.

참조: 양창순, 건강한 가족이 되는 4L, 세바시 458회.                                                       

이전 06화 가족의 탄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