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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Nov 01. 2020

가족의 탄생

《가족의 탄생》, 2006년.

감독: 김태용

제작: 블루스톰

각본: 김태용, 성기영               


영화 《가족의 탄생》은 세 가지의 이야기가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독립된 이야기인 듯하면서도 대나무 뿌리처럼 끊을 수 없는 맥으로 이어지는 인간사처럼. 서로 연결되고 엮인 옴리 버스식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독특한 특징이 식탁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인데요. 전통적으로 생각되어온 가족의 의미와 현대인들이 이루고 있는 가족의 새로운 의미를 식탁에서 재해석했습니다. 가족과 식구의 의미를 같은 지평에서 바라보게 하지요.     


# 미라와 무신과 형철의 식탁     

집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 형철이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줌마 무신을 자신의 부인이라며 미라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면서 세 사람의 이상한 동거를 시작됩니다.      


아무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동생과 그에 비해서 성숙했으나 묘한 이미지를 풍기는 새 언니 무신하고 동거가 연신 불편하기 그지없는 미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신이 데려온 누구의 씨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아이(채현)까지 함께 떠안게 되지요. 전혀 계획 없던 인생에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현실들이 현재가 되어 다가오는 인생과 이상한 가족의 탄생. 그런 이상한 가족의 탄생을 이 영화는 전혀 이상하지 않게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 나한테 왜 이래? ㆍㆍㆍ 너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 선경과 매자의 식탁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족의 이야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사랑. 그 '모호한 다양성'을 생각하게 하는데요. 사랑밖에 모르는 엄마(매자)는 가정이 버젓이 있는 남자와 혼외 연애를 하는 것도 모자라 그 사이에 남동생까지 낳게 됩니다.      


자신의 가정을 버리지 못하는 남자와 그 현실에 전혀 불만 없이 자신의 생을 살아가는 엄마를 보는 딸은 엄마가 이용당하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합니다. 타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선경은 지켜보며 혼자 애태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마치 엄마의 운명처럼) 남자들에게 이용만 당할 것 같은 생각에 (남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그런 자기와 엄마의 삶을 불평과 투정으로 이어가지요.      


그러나 엄마는 불치병으로 죽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불평을 하거나, 남편에 대한 불만도 없고 그걸 이해해주지 못하는 딸에 대한 원망도 없이 자신의 삶을 살다 떠나지요. 선경은 이젠 배 다른 동생(경석), 엄마가 남기고 간 유일한 유산이자 사랑을 받아 안게 되는데요. 그녀의 심정에는 엄마에게 못 다 한 사랑의 값을 치르는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씨가 다른 경석의 밥상을 책임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선경과 동생은 엄마의 죽음(사랑의 죽음)으로 남매라는 가족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 경석과 채현의 식탁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우리 그만 하자. 난 니 옆에 있으면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아."     


영화는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두 가정에서 자란 사내아이 경석과 채현이 성장한 이후, 우연한 만남을 역 플래시로 보여주면서 다시 전개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나'와 다른 '너'를 이해하까지 인간의 편협한 시각과 오해가 낳은 우리의 현실과 내면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 그리고 자기의 시간과 공간이 아닌 타인의 시간과 기다림으로 얼마나 인내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가를 성찰하게 합니다. 더불어 식구가 참가족으로 탄생되기까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 가족의 역설     


"너. 나한테 왜 이래?"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너는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사랑한다고 영원히 함께 하자...'라고 속삭이고 다짐했던 사람. 한때는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해주었던 사람이 '원수'로 변해버린 날들을 기억하시나요?     


가족의 의미를 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하죠. “가족(家族)은 대체로 혈연, 혼인, 입양, 친분 등으로 관계되어 같이 일상의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공동체) 또는 그 구성원을 말한다. 집단을 말할 때는 가정이라고도 하며, 그 구성원을 말할 때는 가솔(家率) 또는 식솔(食率)이라고도 한다.”     


가족의 의미는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바라보면 전통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로 의미로 나누어지는데요. 이는 가족의 의미가 구성원을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에서 기능과 가치관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의 변화를 겪고 있다고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핵가족 시대와 다문화 가족 시대에서 '가족'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되묻고 싶습니다. 아니 가족 이전에 인간(人間)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다시 되짚어 봅니다. 그 존재론적 의미와 기능적 의미 말이지요.     


“스웨터가 따뜻한 이유는 털실 사이에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사이’란 ‘품을 수 있다’는 의미다. 털실과 털실 사이의 공간이 따뜻함을 품는 것처럼. 인간人間이라는 한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람이라는 글자로 충분한데 ‘사이’라는 뜻을 가진 ‘間’ 자는 왜 붙었을까?     

어쩌면 ‘사이’라는 말이 삶의 비밀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관계가 가장 힘들다고 대답한다. 사람 사이, 그 간격이 너무 가까워지면 숨 막히고, 너무 멀어지면 쓸쓸하다. 그 간격을 잘 조절한 사람은 평화롭고, 잘 다루지 못한 사람은 외롭거나 아프다.” -김미라,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중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더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는 사람들. 가족의 역설적 의미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은: 1. 근대 이후 인간의 삶(관계)은 더 이상 씨족과 부족, 혈연과 혼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 더 이상 혈연중심의 삶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대인의 삶은 가족의 탄생과 해체의 반복 속에서 때때로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출발했던 항구를 잃고 표류하는 배들이 많지요. 3.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있어서 가족이라는 단어 속의 친밀감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불편한 상황들. 그 역설의 자리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립할 공동체가 요구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길을 잃은 이들과 가족(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상처를 주고받은 모든 이들에게 쉼터가 되어주고 등대와 정거장이 되어줄 중재자가 절실하다는 뜻이지요.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목적지를 안내해 줄 수 있는 이들 말이지요.

     

# 한 걸음 더     

- '가족의 역설': 가족 공동체의 장점이자 단점은 자신의 허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구성들의 삶의 자리라는 것이죠. 자신을 너무도 잘 알기에 쉽게 이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만큼 존중받을 수 없는 곳이 또한 가족 공동체이지요.      


자아의 원의와 상처, 희망과 약점조차 너무나 잘 알기에 가장 이해받기 쉬운 곳이면서도 무시당하기 쉬운 자리 또한 가족이라는 삶의 자리이지요. 뿌리를 내리기 쉬운 땅이 가족이라는 땅이지만, 또한 버텨내기가 지극히 힘든 곳이 가족이라는 땅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의 역설입니다.     


- 의미 찾기: 누가 나의 가족인가를 되물어야 할 때입니다. 식구가 가족으로 재탄생하는 시대입니다. 코로나 19 시대에 혼밥과 혼술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족이라는 말은 이집트의 미라를 마주하듯 황당하기도 하고 어색한 죽은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살과 눈빛을 마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현실을 인정하면 과연 누가 나의 가족일까요?     


최우선으로 인정해야 할 점은 가족의 구성원은 성격도, 가치관도, 습관도, 좋아하는 것도,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지치고 힘들 때 기댈 어깨가 되어주고 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며, 그의 원의와 목적을 살펴주지 않을 때 가족은 원수가 되지요.     


- 관계라는 "의미의 복기": 극적인 비유로 친구는 선택적으로 만날 수 있지만 가족은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상처를 준 친구는 만나지 않으면 되지만, 가족은 만나지 않아도 상처로 남겨지는 관계, 서로를 향한 기대치가 높은 관계 또한 가족이지요.     


선험적으로 주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관계라는 '의미의 복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가족이니까 이러이러해야 한다." "가족이니까 그럴 수는 없지."라는 식의 프레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주인공은 '나의 나'입니다. 복기된 자아. 나를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제3의 나'입니다. 길을 잃은 이들과 가족(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상처를 주고받은 모든 이들에게 쉼터가 되어주고 등대와 정거장이 되어줄 중재자는 바로 당신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복기된 자아. '제3의 나'여야 합니다.     


너무 자주 봐서 지겹고,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무섭고, 항상 옆에 있어서 귀찮지만, 곁에 없으면 걱정되고 행여 몸이라도 아프면 신경 쓰이고 기대에 못 미치면 화가 나는 가족을 초월한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단순한 의미의 식구를 넘어서는 진정한 가족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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