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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Nov 01. 2020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1992년.

감독: 로버트 레드퍼드

제작사: 컬럼비아 픽처스

각본: 리차드 프리덴버그, 노먼 맥클레인

원작: 노먼 맥클레인     


# A River Runs Through It     


“사랑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 그들은 내 마음속에 있다. 어둑해진 계곡에 홀로 있으면 모든 존재가 희미해져 나의 영혼과 기억에 합쳐진다. 빅 블랙풋(Big Blackfoot) 강물소리와 네 박자 리듬 속에서 물고기가 튀어 오르길 희망할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된다. 흐르는 강물처럼.” (영화 엔딩 멘트에서)     


‘흐르는 강’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간과 인생, 사랑과 기억 그리고 감정.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강과 낚시에 투영된 실존인물 노먼 맥클레인(Norman Maclean, 1902 - 1990)의 가족에 대한 성찰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의 가족은 몬태나주 서부 미줄라(Missoula)의 송어가 많은 강 주변에서 살았습니다.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와 어머니, 노먼과 그리고 세 살 터울의 동생 폴이 가족의 구성원입니다.      


1. 가족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조차 없는 종교적 권위의 아버지

2. 정신과 감정이 마비된 입 없는 어머니

3. 이타적 심성의 우유부단한 장남

4. 신의 리듬을 거부한 독립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한 반항아 막내     


1. 가족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조차 없는 종교적 권위의 아버지: “기독교인으로서 아버지는 인간을 죄지은 자로 여겼다. 하나님의 리듬을 익혀야 힘과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온갖 좋은 일과 구원뿐 아니라 송어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은혜는 예술을 통해 얻어지고, 예술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에서 엿볼 수 있는 교회와 가정의 분위기는 엄격하고 질서 정연하고 숙연하기까지 합니다. 종교 교육과 가정교육을 분리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엄격한 종교적 교리에 집착한 탓일까? 어린 시절 아버지의 표정은 고집스럽고 단단하다 못해 비인간적으로까지 보입니다. 그는 가정과 교회에서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원칙을 고수하며 가족을 통제하는 전형적으로 가부장적인 인물로 나타납니다. 또한 그의 엄격함 뒤에 종교와 낚시에 대한 열정만큼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가진 자녀 교육에 대한 고집스러운 집념이 자리 잡고 있지요.  

   

2. 정신과 감정이 마비된 입 없는 어머니: 엄격한 통제와 벗어날 수 없는 권위의 그늘에 사는 어머니의 존재감은 없습니다. 글 쓴 이의 기억에도 어머니는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아버지처럼 감정표현을 하지 못합니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면 안 되고 생각을 들어내면 안 되며, 더욱이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어머니는 작은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들으면서도 마네킹처럼 반응하지요.

      

3. 이타적 심성의 우유부단한 장남: “동생과 나는 박자에 맞춰 낚싯줄 던지기 연습을 했다. 아버지는 매번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낚싯줄 던지기는 예술이며 네 박자 리듬에 맞추어 10시와 2시 방향 사이로 던져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과 자신의 위치에 충실하고자 했던 장남은 네 박자 리듬에 익숙하려고 노력합니다. 흐르는 강물을 역행하려 하지 않지요. 흐르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려는 심성의 소유자인 장남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집착에 가까운 아버지의 교육과 통제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죽을 때까지 홀로 서지 못하는 인간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군중의 심리를 따르고 군중에게 관심받기를 원했던 인물로 보입니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이 없지요.      


4. 네 박자 리듬을 거부한 독립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한 반항아: “그 순간 나는 명백히 깨달았다. 완벽함을 목격했다. 동생은 ‘빅 블랙풋’ 강둑이 아니라 우리 앞에 섰지만, 거칠 것이 없었다. 모든 법칙에서 벗어난 예술작품 같았다. 나는 또 명확히 깨달았다.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수도 없다.”(대어를 낚은 동생을 보며)     


성경에 등장하는 돌아온 탕자를 기억나게 하는 작은 아들은 무모하리만큼 독립적인 리더이자 반항아입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네 박자의 리듬을 따르기보다 새로운 리듬을 찾으려 했던 그의 반항은 종교와 윤리까지 넘나들며 가족과 자신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신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인물이지요. 술과 도박에만 빠지지만 않았다면, 그의 삶은 아버지의 말 대로 아름다웠을 것이다.      


# 가족이라는 이름을 이해하기 위해     

- 가족은 평면적 관계이며, 단순한 관계인가?      

가족은 가장 복잡한 내면의 전쟁터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만나는 얼굴들. 가족이라는 그들의 사회는 단순하고 평면적인가? 가족은 물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특별합니다. 나아가 심리적, 정신적으로도 많은 부분을 함께 공유합니다. 그러나 그 공유점은 구성원 각각에게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요. 가족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에 속한 독립된 인격적 개별체는 선천적으로 기질과 성격, 성향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비록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더라도 말이지요. 특히 우리는 가족 개개인의 내면을 완벽할 게 알아차릴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 가족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피난처인가?     

가족은 청개구리 같은 감정과 무자비한 이성의 작은 전쟁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족에게 쉽게 하는 말 중에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너를 너무 잘 알아. 눈빛만 봐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지.”      


오해일 수 있습니다. 또 가족은 다른 사회(공동체)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지배하기 때문인데요. 오해의 시작은 시각적 자극보다 때 묻은 기억을 더 신뢰하기에 때문인데요. 감정은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감정은 흐르는 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특히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구에 의해 오염된 감성과 비합리적인 이성에서 비롯된 신념의 오류는 자신의 자아를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위치에 자리하려 합니다. 때문에 타인을 향한 소유와 지배와 컨트롤 욕구는 다른 동물에서도 나타나지만, 인간은 더 심각하지요. '내 소유물과 다르지 않다'라는 식의 가족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가족을 자신의 수족처럼 다루려 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가장 정서적으로 가깝고 감정적으로 함부로 대하기 쉬운 가족에게 감정은 더욱 무자비할 때가 많습니다.

      

- '나'는 신에 버금가는 판관인가?     

부모의 의무와 선천적으로 주어진 책임을 당연한 권리로 착각하는 데서 발생하는 오류들은 독선적 감정의 오류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데요. 책임과 권리를 착각한 가족 구성원은 그 상대방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향한 나의 기대치는 합리적이야. 너는 (내가 원하는 대로) 충분히 할 수 있고. 꼭 그래야만 해. 나는 너의 부모(자녀)이니까.”     


감성이 제멋대로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면, 이성은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과 기준치를 잘 포장할 줄 아는 멋있는 재주를 습득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인간의 그럴듯한 능력 가운데 하나는 비합리적인 잣대로 짜맞춤 된 결론을 아름답고 명확한 포장으로 합리화할 줄 아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지요. 특히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독선적인 감정은 마음대로 칼을 휘둘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가족에게로 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가족도 감정과 이성을 소유한 인격체이기에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손아귀에서 벗어나지요. 제멋대로인 감정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구성원을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 사랑이라는 이름의 오류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언어를 익히면서 인간은 자기만의 사전을 소유하게 되는데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운 ‘엄마’라는 단어도 그 해석이 제 각각입니다. 사전의 저자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지요. 아니 정확하게는 자기 감성이 쓴 자기만의 사전이지요. 이성이 사전을 썼더라면 가족들 사이에서는 좀 더 공감되고 공통되는 언어들이 더 많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사전의 저자는 ‘00 이의 감정’입니다. 때문에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과 이해, 그 풀이도 '백인백색'일 수밖에 없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 너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독립적이고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면서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 인간이라는 그 창조적인 존재를 사랑하기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일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속으로 낳은 자녀이지만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게 인간이지요.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언젠가는 어려움에 부딪힌 가족에 관해 같은 질문을 할 것입니다. ‘도와주고자 하지만, 주여,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래서 가장 가까운 이를 돕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도 모르기도 하고 흔한 경우이지만 우리가 무엇을 주려고 해도 거절을 당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마지막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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