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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Oct 04. 2024

굳이 완소노예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착한아이' 라는 병마에 완전 세뇌되어 사는 사람들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탐색할 기회를 사회적 의무와 역할에 의해 차단 당한 남자가 볼 때,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은 '나를 우습게 보고' 만나기만 하면 쪼아댄다고 말한다. 자신이 여성폭력범처럼 무서우면 어림도 없을 일일거라고, 자신이 너무 착해서 만만히 보고 깝치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건 본인의 사고방식안에서나 해당할 일, 나의 저돌적인 앞담화는 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아주 어릴 때는 귀염받는 아빠 딸이 었기 때문에, 내가 종알종알종알종알 아빠 앞에서 떠들면, 아빠 엄마는 내 입을 보고 어린아이가 말도 어쩜 그렇게 똑, 부러지게 잘해?하며 대견해 했었다.


고아로 자라 유교질서에서 자유로우셨으며, 검정고시 출신인 아빠는 학교나 큰 기업안에 종속되어본 적이 이 오직 자신의 머리와 기술력으로 생존하고 번영을 이루셔서인지  나와 즐기는 자유토론에 마음이 열린 분이셨다. 물론 나를 가장 예뻐하셨지만 순수하고 생동감 있는 모든 어린아이와 동물들을 존중해주셨고, 그들도 아빠의 자상함에 매료되었었다. 항상 다른 의견을 가진 나를 격려해주셨고, 지지해주셨다. 내가 자신과 같던 다르던, 기존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시간 자체를 '섬겨'주셨다.  아빠에게도 여타 약점이 있고 인간적 결점이 있지만, 내가 아버지로서 존중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셨다는 것. 나 자신에 대한 존중을 몸소 가르쳐주셨다는 것.

아버지가 내게 주신 가장 큰 마음의 힘이자 자산이다.


필히 남들과 달라 외로웠을 그들이지만, 무학에 고아인 내 아버지의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남다른 논리적 사고력과 센스, 획기적 기획력을 디폴트값으로 태어나고 성장한 내 입장에서 볼 때,  공부많이 하고 학교 오래 다닌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이 시대의 사람들은, 스스로 유식하다지만 정작 자신의 부족한 사고력을 막대한 정보량으로 커버치려고 한다는 느낌까지 줄 정도이다. 이제는 일반적인 남과 비슷해지는 나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바, 쿠키커터같이 자로 잰듯 남이 정한 기준만 따라하고, 그에 따라 남을 평가하는, 발전에도 한계가 있어보이는 한국 사회에 규격화된 범인들과는 분명하게 다른 모습이시다. 남의 피셜이다.



한편, 8남매 중 막내딸로 자란 엄마는, 점점 몸과 머리와 마음이 커 사춘기, 그 이후가 된 내가 쏟아내는 말을 슬슬 부담스러워하셨다. 엄마는 외갓집에서 아들로 태어났어야하는 시점에 딸로 태어난 부적절한 인물이었고, 그랬기에 오빠들의 구박에 세뇌되어 늘 자신감이 없고, 입은 닫힌 채 자신이 할 일만 묵묵히 해냈던 사람이다. 한국 전체에 퍼진 유교질서나 독재도 문제라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배움의 정도와 관련 없이 사회에서 세뇌하는 관념을 비판적 사고없이 받아들인 그 가족과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성인이 될 무렵 때까지 사회생활을 지속하시던 어머니는 개인간의 싸움을 극도로 싫어하셨다. 업무의 효율성을 방해하기때문에 다른 의견을 싫어하던 한국사회속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입장인거다. 게다가 본인의 입장과 다른 입장에 대해, 나이도 어린 내가, 족보상 한 단계나 낮은 본인의 자식인 '내가' 자신의 입장에 맞서 대항하는 것 처럼 보인 것이다.


자신은 스스로의 생김을 거세당하고, 억제하고, 눌려 사는데,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스스로를  자기자신마저도 외면하고 살아야하니 너무나 외로운데, 나 혼자 종알종알 잘났다고 떠드는 꼴이 자신을 찍어누르려 하는 행위같아서 싫다고 하셨다. 아무리 사회가 바뀌었다지만 아직도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이다.

 

사회의 주장에 세뇌 되어 있는 엄마의 입장에서는 나의 행동이 미성숙일테지만, 결론적으로 싸움을 싫어하고 획일적 기준을 빈강제하는 엄마가 미성숙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전체집단의 효율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조직의 지배자라도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 이견을 내지 않는 사람을 모아 운영할 것 같다. 효율적 행동자세가 몸에 벤 군필자에게 가산점을 줄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비난하고 힘을 합하지 못함에 즐거울 것 같다. 정작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할 테니까.


지도자 입장에서는 한국사람 채용이 개꿀이다. 외국사람들도 한국사람의 한마음 한뜻 정신을 이미 내가 캐나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알고 있고, 나를 자신들의 노예로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내게 실망했고, 나는 이민 선배들이 외국인들 사이에서 마저도 나 몰래 미리 깔아놓은 상명하복이 캐나다에까지 미친 영향에 몸서리쳤다.



외국사람들은 피부색이 어떻든 한국사람처럼 그렇게 매니저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 주장되지 않으면 당연히 뭍혀버리는 권리,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당연히 이사람 저사람 요구사항을 받아주다보면 매니저는 힘드니까 그럴때에는 좀 입닫고 수용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럴때 믿는 구석이 고도의 경제력을 단시간안에 획득한 경험, 하나로 뭉친 경험이 있는, 자기주장은 완벽하게 묵살하고 앞만 보고 뛰며, 그걸 경쟁이라 믿고 비교라 믿는 생각 없는 한국인이다.


둘째아이와 첫째아이의 킨더가든 선생님은 동일인물인데, 그 선생님이 나에게 직접 해 준 이야기이다. 2년간 거주했던, 아파트의 관리자가 한국인을 유난히 좋아했던 이유이다 (한국인만큼 프로퍼티에 대한 컴플레인 없이 렌트비를 그렇게 꼬박꼬박 잘내는 나라 사람들이 없단다.). 한인고용주와 외국고용주가 한국인을 착취하는것에 자유로운 이유이다. 한방향으로 뛰는 것이 원체 몸에 숙달된 한국인 대학생 및 고등학생들이 성적 장학생이 쉽게 되는 이유이다. 오너가 한인을 매니저로 두는 것에 편한 이유이다.


우리의 지금과 같은 단일화된 무비판적, 싸우기 싫어하는 태도는 전세계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위 외국에서도 소중한 노예로서 먹히는 행동이다.


그런데 그것이, 남녀노소 관련없이 전국민이 걸려있는 착한아이 컴플렉스 우리 스스로에게만 몸과 마음의 병을 만든다.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옆자리에 앉은, 싸우고 견제할 것이 아닌 힘을 합하고 서로를 북돋워줘야하는 한국인 짝꿍에게만 가혹할 뿐이다.


이견을 싫어하는 착한 남편을 보며, 나는 내 어머니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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