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r가지가 없는 경우
우리는 그 사건이 일어날 당시, 서점 나들이를 갔다가 커피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여기서 우리란, 나와 두 딸을 말한다. 나는 노트북으로 에세이 초고를 끄적거리던 중이었고, 딸들은 좀 전에 엄마를 졸라서 얻은 만화책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이들도 나도 한가하게 마음이 풀어지던 오후였다.
호젓하게 앉아서, 프랑스 3대 초콜릿 중 하나인 발로나 초콜릿 파우더 풍미가 훅 풍겨오는 에스프레소 콘파냐(예쁜 매장 언니가 그렇게 말해주었..)를 한 모금 마시던 중이었다. 귓가로 적당한 카페의 백색소음이 들리고, 왠지 오늘은 몰입해서 즐겁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마침, 우리의 대각선 방향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녀의 소리가 고요함을 뚫고 들려왔다.
다둥이 엄마 인생 카테고리에는 이제 더 이상 없을 연애사 같은 것이었다. 어떡하니, 개방형으로 저렇게 크게 말한다면 잘 듣는 수밖에. 나는 다시금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면서 그들의 소리에 집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들의 대화가 너무 원색적인 것이었다. 흠,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콘파냐의 초콜릿 파우더처럼, 그렇게 달콤하고 쌉싸름한 이야기를 해달란 말이야. 송골매 아저씨들처럼 ‘사랑 그 작고 소중한 얘기들’을! 알콩달콩 귀여운 소리를 들려달란 말이야. 그러나 그들과 나의 주파수는 어지간히 맞지 않아 지지직 거리기만 한다. 콘텐츠가 영 별로군, 생각하고,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데 그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남: “X나 X발 이기적인 거야. 이미 지나간 일 가지고, 이해가 안 가게 또 얘기하고 싶냐?, 야 X발, 내가 용서가 안 되면, 그럼, 뭐 어떻게 할 거냐고. 뭐 네가 답은 있냐고. 대안은 있냐고. 대답을 해봐.”
여:……
???, 아… 존 띠, 씨 띠, 씨 띠, 띠띠띠띠띠ㅡ. 욕설이 난무한 남자의 말에 본능적으로 아이들 귀를 막아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어폰도 꽂지 않은 그들은 기특하게도 만화책의 세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들리나 보다.
남: “뭐, 내가 연락을 안 한 게 이해가 안 돼??”
여: “응”
남: “뭐?? 내가 아까 그렇게 설명했는데 이해가 안 되냐고. 답답하다 진짜 하”
여: ……
정말이지 이 책의 제목처럼 우아한 나는, 순간 심장이 벌렁거리고 당혹스러웠다. 아 어쩌지.
그러나 그들은 지금 연애 중이지 않은가, 계속 염탐하고 싶은 욕망이 우아함을 가뿐하게 이겨버렸다. 나는 다시 온 신경을 집중해서 듣는다.
아, 엿들으려던 건 아니지만 남자의 말이 들려오는 순간, 인상이 찌푸려져서 나도 모르게 그들이 앉은 테이블 쪽을 보았다. 맙소사, 그들은 너무나 어여쁜 청춘들이었다. 스무 살도 채 안된 것처럼 앳된 얼굴. 그렇게 고운 아이의 얼굴을 하고서 내뱉는 거친 말들이 영 매치가 안된다.
이해가 안 된다는 여자와 계속 말이 많은 저 남자. 남자의 말은 그 이후로도 그치지 않고 이어졌지만, 모든 문장 하나하나 화를 꾹꾹 담은, 그 얘기가 그 얘기였다. 나로서는 맨 처음 저 욕설이 반인 문장을 읊어대는 대각선의 저 자식을 보고, 이미 여자 편으로 배팅하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문제는 그 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있었다. 그녀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남자가 저렇게 함부로 당신을 향한 언어를 오남용하는데도, 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건가요? 뭐라고 한마디라도 시원하게 던져봐요. 여기서 소리를 질러도, 이 아줌마는 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침묵하는 태도를 쭉 고수하면서 앞에 앉은 남자를 미치게 하고, 나를 미치게 했다.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듯이, 남자의 목소리도 점점 거세게 변한다. 이제 완전 절정으로 퍼부을 무렵, 나는 ‘아! 이 여자는 말이 없는 것이 반응의 일종이군!’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택함으로써,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오은영 박사님 프로그램을 애청했더니 나는 꽤 그럴싸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갑자기 그 분위기에 대해 마음이 조금 관대해졌다.
하지만 남자는 그걸 알지 못한다. 이 아주머니보다는 문해력이 한참 부족할 수밖에.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지껄이다가는, 오늘, 네 앞의 여자 목소리를 듣기는 글렀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이런저런 연애 싸움 구경도 많이 했고, 나 자신도 그런 싸움에 조금씩 가담했던 경험으로 배운 것은, 쌍방 모두 피차 사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문득 그 남자를 가엾게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이 불쌍한 자식아, 너 같은 자식이 연애를 글로 먼저 배워야 해’
나는 정말 자식 같아서, 자꾸 자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 어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남자에게도 있을 어떤 ‘사정’에 주목해보기로 한다. 아까 그렇게 실시간으로 옮겨적은 그 남자의 말을, 감정을 최대한 빼고 다시금 천천히 읽어본다. 그제야 조금씩 드러나는 단서가 있었으니, 남자의 발화에 얼마나 소중한 키워드가 많이 담겨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잠시 탄복하게 되었다.
남: “X나 X발 이기적인 거야. 이미 지나간 일 가지고, 이해가 안 가게 또 얘기하고 싶냐?, 야 X발, 내가 용서가 안 되면, 그럼 뭐 어떻게 할 거냐고. 뭐 네가 답은 있냐고. 대안은 있냐고. 대답을 해봐.”
쓰레기 같은 말 다 빼고 핵심으로 들리는 말만 적어본다. ‘이기적, 이미 지나간 일, 이해, 이해가 안 가, 또 얘기, 용서, 용서가 안 된다니, 답은 있는가, 대안이 있는가, 대답을 해봐’.
여기서 해결의 여지를 찾기 위해서, 분석할 수 있는 몇 가지가 보인다(그걸 내가 왜 찾고 있는지는 모름). 그 남자의 말을 바탕으로 생각해볼 때,
일단, 여자의 입장에서는 남자의 말들에 쓰레기 같은 단어가 너무 많이 첨가되는 바람에, 남자의 키워드와 그 속의 진의를 잘 잡을 수 없다. 거기에다 남자의 고압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도 올바른 의사소통에 마이너스가 된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을 감안해서 남자의 말을 이해하려고 시도해보자. 남자는 여자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기적인가 들어보니, 남자의 근거는 이렇다. 이미 지나간 일을 대화의 주제로 삼고, 반복적으로 물어보는 것, 그리고 그 지나간 일이 아직도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그러면서도 대안은 없는 것.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는 과거의 일 중에, 서로에게 불편하고 껄끄러운 기억들이 있었나 보다. 여자가 남자를 향해 용서가 안 된다면서, 그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것을 보니, 남자 입장에서는 불리해질 수 있는 일인가보다. 당시에 연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해가 안 간다고 하기에 자신은 이미 충분한 설명을 한 것 같은데도 여자는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다. 과거의 일을 자꾸 들추면서 당황하게 만드는 여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남자는 궁금하다. 이에 대해 여자는 지금, 도대체 이 남자가 왜 자신의 마음을 먼저 이해해주지 못하는지, 공감 한번을 제대로 못 해주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남자는 자신이 과거에 실수한 일을 다시 말하는 것이 번거롭더라도, 자기를 못 믿는 것 같아서 조금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여자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줄 수 없겠니. ‘그때 일에 대해 아직도 마음이 쓰이는구나, 모든 걸 떠나서 네가 이것으로 아직 속상하다면 진심으로 미안해. 그렇지만 나를 다시 한번 믿어주었으면 좋겠어.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어질게.’ 얼토당토않은 약속이라도 해주는 것이 낫지 않겠니.
여자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말을 안 하는 방식을 택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설명해주면 좋지 않겠니. ‘네가 이런 말을 꺼내기 싫어하는 것을 나도 알겠어. 나도 자꾸 이런 대화를 하고 싶진 않아. 그런데 나는 그때 속상했어. 이걸로 계속 속상하게 되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아. 지금, 이 주제에 대해, 네가 대화하는 것을 계속 불편하다고 하면서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 너와 어떤 대화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여기에서 해결을 못 보면 헤어질 수도 있겠지. 나는 예전에 너와 연락이 되지 않았을 때 들었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서, 네가 한 번쯤 헤아려보고 진심으로 사과해주길 바라. 나도 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이해할 여유를 얻고 싶어. 아직 내 마음이 잘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서툴게 이야기를 꺼내는 나를 이해해줘, 그때의 내 심정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공감해주길 바라는 거야. 그렇게 내게 신뢰를 주렴’
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남자는 지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우린 다른 세계에 있나 봐”
아, 이 친구 생각보다 똑똑하다. 이 중요한 진리를, 저 어린 나이에 벌써 깨달았다니. 그러나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건강한 연애를 지속할 수 없다. 각자 다른 세계에서 와서 반하게 된 남녀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어도 언어가 달라서, 사랑의 이해조차 다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또 많은 오해가 발생한다. 이미 오래전에 대인관계 전문상담가 존 그레이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을 통해, 깊은 통찰력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남녀는 의사를 전하는 방법부터,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다르기에,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라고 여겨도 무방하다고 말이다. 남녀관계의 미묘한 어려움들을 해결해가는 방식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서로의 언어가 다름을 이해하고, 그 행성의 언어를 일단 배워보는 것이다.
아직 어리지만 서로 다른 행성에서 막 도착한 저 친구들도 사정은 같다. 콘텐츠는 분명 사랑인데, 예쁜 그릇 안에 담아서 보여주지 못한다. 이어질 듯 말 듯, 통역이 될 듯 말 듯 결국 서로 안에 외쳐대는 진의를 발견하지 못한다. 다른 행성의 언어라든가, 이런 것이 난해하다면 가장 속성으로 배우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인류 공통으로 좋아할 만한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의를 지키되, 솔직해지는 것. 진실하게 고백하되, 다시금 예의를 다하는 것. 남자처럼 윽박지르는 말투나, 여자처럼 침묵의 방식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 그래도 속사포처럼 내뱉는 남자의 마음도 알 것 같고, 고요한 저 여자의 마음도 알 것 같다. 아직은 상대에게 나의 필요를 건강하게 전달하는 법을 잘 알지 못해서, 고운 언어로 대화해 본 경험이 부족해서, 결정적으로는 그런 어른을 잘 만나질 못해서, 보고 배운 경험치가 부족한 탓이다.
차라리 그들이 좋은 책을 만나, 사랑을 글로 배우는 게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우리가 먼저 책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의 말을 신중하게 경청하고,
다정한 태도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어른으로 살아간다면,
그 두 사람은 보고 배운 경험치로
마침내 얼마나 더 근사한 사랑을 하게 될까.
담담하고 친절한, 그런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