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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풍 Oct 15. 2022

현재를 살아가는 마음자세

몸은 시시각각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이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생각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에서 떠오른다. 몸은 당장 눈앞에 전개되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을 처리하고 있는데, 현재 상황 처리의 판단 기준이 되는 생각은 과거의 유사한 경험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과거의 잣대로 새로운 현실을 재단하고 대응한다. "죽은 자들로 죽은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라는 말씀이 주는 여운이 크다. 운이 좋아서 가끔 맞을 때도 있겠지만, 새로운 사람이나 새로운 상황에 옛날의 판단 기준을 들이대면 실수할 확률이 크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다가오는 매 순간 새로운 현실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생각의 수단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이 제시하는 방법은 지난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몸이 먼저 경험하고 새로 얻은 교훈을 나중에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경험이 나에게 바로 적용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매 순간 다가오는 새로운 현실과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정신적인 수단이 없는데. 그저 몸이 맨땅에 헤딩하고 아픔을 느낄 뿐이다. 몸에서 배운 교훈을 깨닫고 회복할 즈음에는 벌써 전혀 새로운 현실이 다가와 있다. 오죽하면 지금이 아니라 내일, 내년, 혹은 다음 생에 기대를 걸까?

어떤 삶이 지금과 현재를 잘 다루면서 살아가는 방식일까? 결국 해답은 잘 산다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있다. 권력, 자리, 돈, 명예, 안전한 생활여건 등이 늘어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면, 그러한 목표는 영원히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고 다투는 모습이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질이나 지위를 등한시한다고 해서 깨달음이 얻어지고 당장의 빈곤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개미나 벌들을 보면, 무언가를 얻으려는지 끝없이 움직인다. 사람도 자신은 모르지만, 무언가를 얻으려고 늘 애쓴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사람이 개미나 벌들과 다른 점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비참하게 생각하는 점일 것이다. 왠지 모르지만 동물이나 곤충들은 육체적인 고통을 느껴도 인간처럼 정신적으로 비참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물들은 모든 순간에 그냥 몸으로 살아간다. 인간만이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따져보지만, 별로 효과가 없다. 늘 나만 손해 보는 것 같다. 사람도 하루의 대부분을 몸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 다만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생각을 하고 해결책을 과거의 유사한 경험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그 이유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반복된다"라는 말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미 살아본 사람에게는 나에게 닥친 일이 이해가 되겠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인 일들이다. 나의 삶은 나에게는 늘 새로운 상황을 보여준다. 타인의 경험에 비추어서 내가 나의 삶을 잘 안다고 여기면 안 된다. 나의 얼굴, 지문, 유전자 배열은 세상 누구와도 다르다.

새로운 날들과 상황을 다루는 단일한 방법은 없다.  어떤 과거의 분석 수단을 동원해도 복권이나 경마에서 이길 수 없다. 그냥 매번 닥치는 순간을 경외감으로 만나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늘 새롭게 깨지고, 혹시 운이 좋으면 횡재하고, 늘 아파하는 것이 인생이다. 왜 스토킹 방지법만 있을까? 왕따 금지법, 타인에 대해 무시 방지법, 심리적 폭행방지법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법에는 어떤 기준이 필요할까? 그런 식으로는 인생의 오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생은 온전히 나의 문제이고 나의 경험이다. 주변 사람과 나의 정신을 나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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