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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풍 Aug 31. 2023

인간 존재의 고귀함 자각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다. 보통은 사람이 자신의 내적인 자극, 외적인 자극 요소들에 반응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을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내적인 자극 요소란 부정적인 감정과 에고가 갑자기 빚어내는 기억, 상상, 추측을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오늘에 이를 때까지 경험한 것들, 교육받은 것과 유전된 것들, 나의 지위나 출신나라는 정체성을 형성한다. 바로 이 정체성이 에고라는 개념으로 삶의 매뉴얼로 작용다. 내 속에 내가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 주인공은 자신이 경험한 "라테는 말이야"라는 고정된 스토리를 계속 우리에게 들려준다. 에고에게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냥 중립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에고는 호르몬이라는 감정장치를 동원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매우 실감 나게 한다. 에고의 이야기 자체가 매번 똑같은 내용이고 부정적인 기억이 많아서 삶의 진행방향을 왜곡시키고 제한한다. 외적인 자극 요소도 매우 많다. 우리를 순간적인 쾌감에 이르게 하는 음식, 남녀관계, 도박, 마약, 알코올, 담배 등이 있다. 권력, 권위, 돈, 사회적 지위나 계급, 근육질의 몸매와 무병장수도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외적인 자극 요소들이다.

이런 내적인, 외적인 자극 요소들이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도전하여 온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자극적 도전들이 인생이라고 믿고, 각각의 자극대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대응한다. 그렇게 매일 시간을 보내고, 늙어 간다. 모든 자극에 대한 대응의 결과로 순간적인 쾌락이나 고통, 더 큰 욕심, 갈등, 번민, 불안이 따라온다. 그리고 인생이 끝날 때쯤 되면,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면서 살아왔지'라고 자문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의 틀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적인 자극인 에고와 감정, 외적인 자극인 권력, 돈, 매력적 대상을 절대 불가침의 신성한 영역으로까지 받들면서 산다. 본질적으로 인간이라는 귀한 존재가 이런 혼란스러운 자극들과 싸우면서 평생 살아가도록 피조됬다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한 삶의 방식이 인간의 본성일리 없다. 인간이 본성을 망각하도록 유인하는 함정들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우리가 울고 웃지만 그건 우리의 삶이 아니다. 인생 자체도 고정된 스토리를 가진 에고의 드라마에 빠져있는 한, 그것은 우리의 진짜 삶이 아닐 수 있다. 같은 드라마를 극장의 스크린에서 보느냐 아니면 내 머릿속의 홀로그램 스크린에서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인간과 우주를 비유하는 소우주와 대우주의 조화라는 고대 동양사상이나, 하나님의 이미지를 닮게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세기 말씀, 그리고 인간이 우주적 지성의 부분이라는 신사고적 생각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공통적인 입장을 말하고 있다. 바로 사랑을 베풀고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인간이 이 땅에 보내졌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은 모든 만물을 사랑하고, 더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의 을 발휘해야 한다는 인생관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고귀한 존재이다. 고귀한 존재에 걸맞는 인생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인간에게 부여된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그렇지 못하고 지금처럼 내적인 자극과 외적인 자극 요소들과 싸우며 혼돈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동물들의 삶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특히 창의적인 인간의 본성대로 살지 못하는 인생은 늘 기대감과 의타심의 노예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산다. 스스로 창조해야 하는 사람이 다른 존재들의 힘이나 환경에 의지한다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해 봐서 알지만, 인간이 기대하는 것들은 절대로 완전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기대 자체가 환상이기 때문이다. 늘 매사를 기대하고 살다 보면, 자신이 가진 힘을 망각하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신념이 뼛속에까지 단단하게 각인되어 있다.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동시에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주체성이 없고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룹을 만들고 그 속에 가짜 나를 긴 채 함몰되어 산다.

주체적인 인간이란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창의성과 사랑의 마음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지구가 40억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것과 같다. 지구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인 생명체들의 삶의 터 제공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 에고나 불안한 감정에 시달리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렸기 때문일 수 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지금이라도 내가 왜 인간으로서 이 지구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다시 잘 생각해 보면, 즉시 에고와 감정으로부터 해방되고, 동시에 권력, 재물, 매력추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주변 만물을 모두 배려하고 돌봐 주는 것이다. 창의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내 삶의 주변에서 남을 모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조화롭게 개선한다는 의미이다. 너무 오랜 세월을 가짜 본성인 에고, 부정적인 감정, 권력, 권위, 돈, 지배욕 등을 따라 살다 보면, 몸속 신경 체계도 그에 따라 그릇된 경로들이 형성되어 있다. 창의력의 발휘나 사랑의 실천이라는 새로운 경로를 만들고자 하면, 뇌 속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런 혁명적인 변화란 인간의 진짜 본성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에 즉시 일어난다. 모든 의타심을 버리고 내 인생을 내가 살기로 결심하면 된다.

이 우주 전체에서 나만이 나를 돌봐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만이 내가 아플 때, 나를 병원에 데려갈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나만이 산속에서 자연인으로 살지 말지 삶의 방식을 결단할 수 있다. 나만이 지나가는 지친 사람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줄 수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다. 하늘이 아무것도 안 하고 바라기만 하고 기대만하는 사람을 도와줄 리 없다. 인간이 자신의 본성대로 먼저 움직이면, 신도 도울 것이다. 나의 선행 조치가 없는 상태에서는 나머지 모든 존재는 공허하다. 누워서 또는 앉아서는 아무것도 얻 없다. 지금까지는 너무 내 자신의 능력을 간과했다. 모든 기대감은 질병이다. 심리적, 물적 기대감을  철저하게 버리는 것이 주체적인 삶으로 변화하는 지름길이다. 기대감과 의타심을 버리면, 그동안 몰랐던 나의 진짜 힘이 내 속에서 꿈틀거림을 느끼게 된다. 하나의 드라마를 반복해서 즐기는 내적인 에고라는 우상과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외적인 물질과 권력이라는 우상을 보이저 3호에 실어 은하계 중심의 블랙홀에 있는 사건의 지평선으로 보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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