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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풍 Jul 13. 2020

죽음

그리고 꿈

죽음만큼 인간을 철저하게 사로잡는 문제는 없다. 그러나 죽음만큼 알 수 없는 것도 없다. 죽기 직전까지의 두려움이 있겠지만, 죽는 그 순간에는 더는 느낌이 없으므로 두려움도 없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한 가지 신비한 점은 사람들이 평소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어떤 한계 상황에 처하거나, 또는 자신이 믿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는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였고, 삶과 죽음 관련 세계적인 연구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는 <생의 수레바퀴>에서 2만 명 이상의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 "죽음은 고통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며, 그저 순전한 은총의 눈송이처럼 우리에게 조용히 찾아올 뿐이다"라고 죽음을 정의한다. 그녀는 20대 초반에 2차 세계대전 동안 인도적 구호 사업에 참여한 경험과 의사로서 평생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며 느낀 체험을 전한다. 많은 환자가 전쟁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수용 태도로 인해 높은 회복력을 보인 것을 목격하고 놀랐다고 한다. 인간과 모든 생명체의 본질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과 생존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는 점을 배웠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몇 가지 말은 인상적이다. "죽음만큼 쉬운 일은 없다. 오히려 삶은 가혹하다. 삶은 어렵고, 힘든 싸움이다. 삶은 학교에 다니는 것과 같다. 많은 숙제가 주어진다. 배울수록 숙제는 더 어려워진다. 그러나 과제를 다 배우고 나면 고통은 사라져 없어진다. 그리고 사람은 배워야 할 것을 모두 배웠을 때 삶을 마감한다"라고 삶과 죽음을 비유한다. 그러나 그녀가 죽음에 관한 연구를 한 진정한 이유는 삶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기 위한 것이었으며, 죽음을 통해 인간 존재의 유일한 목적이 성장임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수많은 죽음과 임사체험에 관한 사례들로부터 공통된 사실이 발견된다. 그녀가 전하는 죽음의 체험에는 '전혀 고통이 수반되지 않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재회하고, 죽음으로 안내하는 존재가 있으며, 큰 빛과 조건 없는 사랑의 체험 등'이다. 필자도 의식을 잃을 정도로 죽음 직전의 큰 교통사고를 2회 경험했는데, 두 번 모두 차가 충돌 직전에 약 5초 동안의 짧은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고, 불안감이 사라진 대신 ‘아 이렇게 가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매우 편안한 마음을 경험했다.


완화치료 간호사인 샐리 티스데일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에서 "우리는 위태로운 삶을 너무나 소중히 여긴다. 깨질지 모르는 도자기를 아끼고, 덧없이 흘러가고 변화무쌍한 삶에 간절히 매달린다. 태어난 모든 것이 결국 죽고 사라지지만 인간은 바로 그 스러져가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라고 말한다. 샐리 티스데일에 따르면, 죽음에 대한 수용은 거부가 더는 통하지 않을 때 이뤄지며, "우리 모두 미래의 시신임을 인정하는 것이 죽음의 두려움과 대면하는 첫걸음이다"라고 말한다(동 저서에 대해서는 필자의 별도 글에 책리뷰가 있음). 인간을 미래의 해골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미래의 시신이나 미래의 해골이라는 말은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종착역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죽음과 관련해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이다. 대부분 죽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장자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와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장자는 삶과 죽음을 사계절의 흐름과 같이 자연의 질서로 보았다고 한다. 오늘날도 가나의 아시아크 마을 사람들처럼 아프리카 일부 원주민들도 장례식을 축제와 같이 치른다.       


인간은 자연과 동물의 보편 현상인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한 불안을 억압하기 위해 문명을 창조했다고 한다. 부처는 임종 때 주변 제자들에게 "고개를 돌리지 마라, 너희도 이와 같을지니라"라고 했고, 몽테뉴는 "죽음에서 그 기이함을 없애버리자. 죽음을 자주 떠올리고 죽음에 익숙해지자"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독배를 받아들이고, 마지막 증언으로 남긴 말은 죽음에 대해 깊은 성찰을 남기고 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군요. 나는 죽음의 길로, 여러분은 삶의 길로. 그러나 우리 중 누가 더 좋은 길로 떠나는지, 그것은 신밖에 모릅니다.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해 조상들보다는 형식적인 인상을 느끼는 환경에서 살아간다. 원래 50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가족이 집에서 사망하면, 가족이 직접 집에서 장례식을 치렀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죽음의 의식에 대해 자연스러웠고 익숙했다. 그러나 불과 반세기 만에 대부분 죽음을 병실에서 맞이하며, 병원 장례식장에서 모든 장례 처리를 대행해주고, 죽음을 낯설게 느끼게 하는 문화로 바뀌었다. 한편, 사람들이 가족이나 친한 사람들이 죽었을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러나 슬픔을 느끼는 심리적 이유는 죽은 사람이 죽어서 안 되었다는 사실도 있지만, 살아남은 자신의 처지가 슬퍼서 운다는 관점도 있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사실 매일 밤 잠들 때 어디론가 우리를 맡기고 떠난다는 점에서는 죽을 때 떠나감과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죽는 순간은 두려워하면서도 매일 밤 의식처럼 치르는 잠 속으로의 떠남은 두려워하지 않는지가 신기하다. 아마 아침마다 늘 다시 깨는 경험 때문에 잠이란 삶의 연속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다. 한편 병원에서 수술 전에 마취제를 맞고 의식을 잃은 후 수술 후에 다시 깨면, 잠에서 깬 것과는 다르게 꿈의 기억은 없다. 잘 때와 다르게 마취상태에서는 원래 꿈을 꾸지 않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죽는 순간을 여행지에 떠나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 전날 밤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받아들이면, 지구에서의 마지막 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꿈속에서 어려운 수학 문제의 해답이나 사건의 실마리를 발견한다고도 한다. 꿈에서 복권의 숫자를 보고 실제로 1등 당첨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꿈속에는 우리 개인의 능력을 초월하는 전지적인 신비한 보물창고가 있고, 꿈은 모든 신화의 이야기에 등장하듯이 하늘의 계시가 전달되는 통로일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런 축복의 통로가 왜 소수에게만 열려있는지도 신비한 현상이다.      


사람은 매일 낮과 저녁에만 살다가 밤이 되면 잠이라는 심연 속에 빠진다. 일단 잠이 들면 밤새 많은 꿈을 꾸지만, 대부분 깨기 직전의 꿈만을 기억한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어젯밤 자기 전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고 연이어 살아간다. 마치 컴퓨터를 켜고 어제저녁에 작업하다 중단했던 소설의 창작 작업을 아침에 다시 연속해서 하는 것 같다. 즉 하루의 1/3을 건너뛰고 저녁과 아침 사이에 조각난 나머지 시간을 마치 옷감을 연결하는 것처럼 꿰매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내가 꿈을 꾸는 것 같지만, 실제로 누가 내 속에서 꿈을 꾸는지 궁금하다. 기억나는 꿈속에는 나의 인생과 관련된 사람이나 이야기도 있지만, 전혀 내가 알 수 없는 장면들도 있다. 장자는 호접지몽에서 ’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인지 알 수 없다’라고 표현했다. 꿈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직도 꿈 세계의 주체를 분명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이 낮 동안의 정신 활동과 관련이 있고, 꿈은 중요한 심리적 행위이며 사람의 소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라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꿈의 주체가 우리 자신의 의식과 감각이라고 여긴 점에서 우리가 나비의 꿈속에 나타나는 가상적인 존재는 아니라고 본 것 같다.     


인간 증거라는 말이 있다. 우주의 신비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우주나 대자연 속에서 어떤 법칙을 찾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다. 동시에 인간도 자연과 우주의 일부이고 중요한 구성 요소이기 때문에, 인간의 내면과 행동 양식을 연구해보면 우주 비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가설에 따른 말이다. 즉 인간의 존재 자체도 우주 비밀의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인간의 몸과 정신에 대해 수많은 연구가 행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생명의 근원, 죽음, 꿈, 감정이입 등 본질적인 문제에는 분명한 해답이 없다. 영화를 볼 때 우리가 좌석에 앉아서 스크린 속을 관람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에는 마치 우리가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과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기도 한다. 아주 예외적이지만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진짜 삶에서 겪은 일인지, 영화 속 내용인지, 꿈속에서 본 것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데자뷔 현상이 있다. 데자뷔란 처음 보는 대상이나, 처음 겪는 일을 마치 이전에 어디서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말한다. 필자의 경우는 주로 상대의 몸동작이나 특별한 자세 등에서 갑자기 느껴진다. 여러 가지 정황상, 분명히 처음 와본 곳이거나, 처음 대하는 사람인데도 과거 언젠가 경험해 본 기시감을 준다. 전문가들은 기억의 오류이거나, 무의식적인 소망의 표출로 보기도 한다. 낮 동안 의식적인 삶, 영화, 기억, 데자뷔 현상, 그리고 꿈과 죽음은 분명히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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