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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May 12. 2020

아이돌 덕질, 어디까지 해 봤니?

나의 약점 혹은 동력

내가 그를 문학 소년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EBS FM 라디오 <아이돌이 만난 문학>에서 모 보이그룹의 멤버 R군이 정세랑의 소설 ‘청기와주유소 씨름 기담’을 낭독했다. 정세랑은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 중 하나다. 이 날 R군은 정세랑의 신작을 아주 맛깔스럽게 잘 읽어냈고 이 오디오북은 음원으로도 출시되었다. 트위터에서 이 소식을 접한 날 내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았다. 그렇다. 여기서 R군은 내가 한 때 아주 열심히 덕질하던 그룹의 ‘차애’ 멤버였다. 래퍼인 그에게 몇 년 전 나는 함민복의 시(詩)들을 노트 한 권에 손수 필사해 선물한 적이 있다. 가사 잘 쓰라고. 그러니 내가 그를 문학 소년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영원히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덕질’은 나의 흑역사다. 나는 살면서 겪은 대개의 누추한 일들과 내게 남은 기억들을 멋있게 포장하는 데에 재능을 타고난 편인데, 덕질은 어떻게 설명해도 멋이 없기 때문이다. 애인들과는 거의 모든 경험과 생각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나누곤 하지만 아이돌 덕질을 했던 시절의 이야기만큼은 도무지 자세히 하질 못한다. 초동 물량 집계를 위해 몇 장의 CD를 샀는지, 팬사인회에는 몇 번 갔는지, 시집 말고도 어떤 선물을 줬는지 따위는 아마 죽을 때까지 밝힐 수 없을 것이다. 말할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쯤 되면 흑역사 정도가 아니라 인생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지금도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K팝의 미래에 대해서는 여전히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러나 특정 아이돌을 일상의 커다란 낙(樂)으로 삼던 나날들의 나는 그 시절 고유의 것이다. 당시 나는 언론사 입사를 희망하던 취업준비생 신분이었고 피부 알러지 때문에 경미한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었으며, 연애 감정을 느낄 만한 이성이라곤 주변에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던 처지였다. 우연히 음악 방송에서 본 무대가 이 그룹의 소위 ‘입구(입덕 계기)’였는데, 컬러 렌즈와 진한 메이크업으로 무장한 뱀파이어 컨셉이 그만 취향을 저격하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컨셉츄얼해서 소위 ‘머글(대중)’의 외면을 사고 덕후들만 공략할 셈인가. 이들의 대담한 전술에 흥미가 일었다.



입덕 후 정주행한 그들의 매력은 개미지옥이었다. 대놓고 ‘컨셉돌’을 자처하면서도 컴백 때마다 들고 나오는 새 컨셉의 완성도는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세계관 아래에 가사와 음악, 퍼포먼스와 의상, 모든 것이 하나 되어 흘러갔다. 동시대 다른 그룹들에 비해 멤버 개개인의 능력치가 뛰어나다고 볼 순 없었으나 정교한 기획의 산물로서는 값어치가 충분했다. 중소 기획사여서 자본의 뒷심이 달렸던 게 훗날 서서한 ‘탈덕’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작은 회사 소속의 인지도 없는 그룹인 덕에 함께하는 팬들에게 서로 동고동락하며 성장해 나간다는 동료애를 심어주었다.



실제로 초반에는 팬덤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팬사인회에 왕왕 당첨이 되었다. 당시에도 멤버 6명 전원이 나보다 나이가 어렸고 나는 그들에게 잊을만 하면 찾아오는 안면 있는 누나였다. 멤버들이 하나같이 착하고 상식적인 유형인 것도 이 덕질을 지속 가능케 한 많은 이유들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도 이들은 누구 하나 과거 논란 따위 없다!) 주변 남성들을 동료 시민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하던 때였기에 좋은 면만 볼 수 밖에 없는 대상들로부터 끊임 없이 위로 받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인회에 갔던 어느 날엔가 나는 기자 논술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나의 ‘최애’에게 ‘J야, 나 주말에 중요한 시험 보러 가. 응원 좀 해줄래?’라고 말했다가 ‘무슨 시험이요? 아 맞다, 누나 법대랬지!’ 하더니 그가 쓱쓱 써준 CD 속 손글씨를 보고 폭소한 적이 있다. ‘OO 누나, 사법고시 꼭 붙을 거에요. 화이팅!:)’ 아무렴 어떠랴. 그가 나를 응원한다는데. 새삼스럽게 사법고시라도 다시 준비해야 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덕질이라는 행위의 또 다른 가치는 바로 팬덤 내부에 있다. 실제로 이 보이그룹 팬덤 커뮤니티는 대단한 여성 연대의 장이다. 아이돌 덕후들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 중 ‘새우젓’이 있다. 너무 작아 일일이 눈을 마주칠 수도 개개인을 식별해낼 수도 없기 때문에 아이돌 눈에 팬들은 새우젓일 뿐이지만, 새우젓들끼리는 너무나도 끈끈하다. 내가 소속감을 느끼던 곳은 이 팬덤 내에서도 만 19세 이상만 가입할 수 있는 성인 커뮤니티였는데, 팬들은 서로를 그룹 이름의 앞글자 ‘V’를 여성 명사(?)로 바꾼 ‘부희’로 불렀다. 그 사이트의 운영자인 ‘왕부희’는 온라인 공간에서의 바람직한 리더십이란 무엇인가를 온 몸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었는데, 커뮤니티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굉장히 민주적이고도 현명한 방식으로 의사결정했다. 나는 지금도 그녀의 현생에서의 직업과 근황이 무척 궁금하다. 그 외에도 우리 안에는 수많은 능력자 ‘부희’들이 있었다. 전국민 유튜브 시대가 도래한 지금 어디서든 먹고 살고 있을 듯한 ‘금손’들은 마치 그 곳에 다 모인 것만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재능과 열정과 용기를 언제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지지해주었다. 때로는 이 공동체가 스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대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도 일 처리가 미숙한 소속사를 규탄하는 웹자보의 중국어 번역 따위를 맡으며 기꺼이 몇 번의 재능 기부를 했다.



얼마 전 오랜만에 강다니엘의 팬인 친구를 만났다. 한데 난데없이 탈덕 선언을 해 적잖이 놀랐다. 남들의 짐작대로 최근의 열애 사실 때문만은 아니란다. 워너원 멤버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이기로 팬들과 약속한 데뷔 2주년 기념일에 강다니엘만 불참했고, 문득 마음이 예전 같지 않더란다. 친구는 이렇게 설명했을 때 주변에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이들이 없다며 속상해했지만 나는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탈덕은 일상의 커다란 부분이 턱 하니 조각 되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덕질이란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가에 몰두하는 일이고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일이며, 그 공동체 내에서 관련된 모든 이들과 오랜 시간 진지한 태도로 약속하고 합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깨졌을 때 덕질은 더 이상 지속가능할 수 없다. 그는 워너원으로서의 강다니엘을 좋아한 것이다.



비록 나는 문학 소년이 된 R군의 그룹을 <인사이드아웃>의 내 마음 속 ‘빙봉’처럼 적당한 때가 되어 행복하게 떠나 보냈지만, ‘라일리’에게 빙봉이 그렇듯 앞으로를 살아내는 힘으로 그 시절의 나를 간직한다. 덕후였던 내 모습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니라 동력이다. 애초에 사랑은 혐오를 이기지 않는가. 믿거나 말거나 누군가를 문학 소년으로 만드는 일은, 살면서 쉬이 이룰 수 없는 공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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