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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Oct 21. 2020

회사에서 희망 찾기

여성 시니어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연말연시가 되면 회사는 임원 인사를 발표한다. 거의 말단 직원인 나의 일상과 별 관련 없는 가십성 이벤트쯤으로 여기던 때도 있었지만 해마다 이것이 내게 주는 의미는 거듭 더 무거워진다. 새로이 임원 명패를 달게 된 이들 중 여성의 숫자는 몇이나 되는지, 성희롱을 일삼던 임원은 결국 직위에서 물러났는지, 젊은 직원들도 널리 수긍할 만한 인사였는지 등에 촉각이 곤두선다. 일일이 그 이름들을 하나씩 나열해가며 혼자 부질없는 분석을 해본 적도 있다. 제대로 된 인사란 복수의 요인을 검토해 개인을 다각적으로 평가한 결과물이겠으나, 어떤 강력한 한 방으로 인사가 결정되는 경우도 현실에선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그만큼 명백하고도 치명적인 결함, 예를 들면 습관성 폭언이 알려지고도 자리를 보전한 인물은 무엇이 그를 굳건히 비호했을지, 그로 인해 경쟁에서 희생된 이는 누구일지 떠올려보게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또 다시 임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50대 남성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카르텔 바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여자 시니어들에게로 고민이 가 닿는다.


회사에서 여성 임원들의 얼굴은 그 자체로 나의 ‘체감 정년’을 대변한다. 내가 회사를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는 일터에서 여자 시니어들을 마주하며 고무되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물려받아야 할 것이 여성의 자리만은 아니며 내 세대의 경쟁 상대란 보다 높은 확률로 남녀 모두다. 놀랍게도 다른 대기업에 비하면 우리 회사의 여성 임원 비율은 그나마 꽤 높은 편이고 지금 실제 내가 속한 주니어 집단에는 여자 동료가 엄연히 다수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 비하면 우리 회사가 아이를 키우거나 여자가 다니기 상대적으로 좋은 곳이라고들 한다. 그러니 사실 이렇게 여성 임원들의 얼굴을 보며 내 커리어를 예측하고 일희일비하는 것이 일견 지나친 피해의식이나 편협함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요인들에 과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식적으로는 물론이고 가까운 동료에게도 절대 드러내지 못하겠다.


엊그제 어린 시절 고향 친구였던 남자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는 모두 서울에서 문과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대기업 6~7년차여서, 늘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사는 편이다. 회사원으로서의 앞날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실제로 능력도 있고 직장에서 인정도 받는 그들은 ‘솔직히 말해서 내가 팀장을 못 달 것 같지는 않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임원은 좀 다른 레벨의 문제겠으나 팀장 정도는 걱정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와 그들의 입장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별다른 방해 요소 없이 내 역량과 실적에 걸맞은 성취를 이룰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는 마음가짐과, 결혼과 비혼, 출산과 비출산 등 여러 선택들이 내 커리어패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사는 태도는 기본값부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 세대가 시니어 자리에 가게 될 즈음이면 세상도 사회 구조도 사내 문화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겠지만, 이런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지금의 심경은 매번 이렇게 복잡하다.


고백하건대 그래서 생긴 작은 습관이 하나 있다. 회사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월급쟁이지만 그 중에서도 여자 보스에 대한 불만이나 혹평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면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은연 중에 이 사람의 역할에 고정 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여성혐오적인 시각을 덧씌워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대화 속 여전히 흔한 ‘여자의 적은 여자’ 같은 프레임이나 뉘앙스에는 최대한 단호히 반박하려 마음 먹는 것이다. 나보다 앞선 세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비즈니스우먼들 개개인에 대한 일말의 리스펙과 연대 의식이, 앞으로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과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발표될 임원 인사에서 희망을 읽어낼 수 있기를, 나는 매년 기대하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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