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했던 음식
언니는 언제나 부엌에 아이패드를 놓고 넷플릭스를 틀어둔 채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요리를 한다. 아마도 요리하는 동안의 흥을 온전히 돋우기 위한 언니만의 습관일 것이다. 나는 이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절로 좋아지고 음식에 대한 기대가 가득 부풀어오른다.
나의 친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다. 터울이 제법 지는 한참 동생인 덕에, 어릴 때부터 나는 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 앞에서 이것 저것 잡다하게 아는 척을 할 수 있고 취향이 다른 애들보다 일찍 정립된 것도 언니의 영향이었다. 우리는 지방 도시에서 차례로 서울로 대학을 왔다. 수능이 끝난 뒤 상경해 언니가 먼저 살고 있던 집에 함께 살게 되면서 그때부터 우리는 한 10년 정도를 함께 살았다. 언니는 솔선수범한 룸메이트여서 늘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맛있는 걸 많이 해줬다. 요리에 취미라고는 없는 데다 줄곧 밖으로 나다니던 동생에 비해 집순이어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험난한 서울살이를 헤쳐 나가는 장녀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자매란 확실히 나이 먹을 수록 돈독해지고 깊어지는 관계였다. 같이 사는 것만으로 다른 위안은 필요 없을 정도였다. 나는 언니가 파스타를 만들어주는 날이면 뻔뻔스럽게도 언제나 ‘면 많이요!’를 외쳤다.
내가 갓 취업을 했을 무렵 언니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년 전, 해외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형부와 살림을 합쳤다. 언니의 신혼 집은 언니와 내가 살던 곳에서 걸어서 5분 거리로 정해졌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이제 언니한테 맛있는 거 얻어먹을 수 있는 형부가 너무 부럽다는 말을 하면서도 곧잘 그 집에 놀러갔다. 언니가 저녁 식사에 초대하면 나는 주로 와인이나 맥주 따위를 사갔고 식사 후 설거지를 했다.
회사에서 평범하게 불쾌한 일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옆 팀 팀장이 하릴없이 내 자리에 와 잡담을 건네고 휴가 계획을 묻더니, 내가 조지아니 라트비아니 해외로 여자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것이 영 보기 싫다며 얼른 결혼이나 하라는 것이다. 내 휴가에 보태준 것이라도 있으신지, 하다 못해 우리 부모도 그런 소린 안 하는데 무슨 자격으로 내 인생에 왈가왈부하시는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그 앞에서는 꿀꺽 참고 언니한테 카톡으로 퍼부었더니 저녁이나 먹으러 오라고 했다. 나는 새 와인을 한 병 사 들고 곧장 언니 집으로 퇴근했다.
그 날의 메뉴는 횡성 한우와 판체타로 만든 라구 파스타였다. 여느 때처럼 언니는 넷플릭스를 켜두고 와인을 마시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토마토 소스에 뭉근하게 끓여지는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어김없이 ‘면 많이’를 요청했다. 넙데데한 딸리아뗄레 면 위로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푹 졸여진 라구 소스가 버무려져 접시에 담기고, 그 위에 곱게 간 파르마지아노 레지아노 치즈가 솔솔 뿌려졌다. 거기다 샐러드와 와인 한 모금까지 곁들이니 곤두섰던 온 몸의 신경이 포실포실 녹아 내렸다. 나는 술기운이 오른 쉐프와 마주 보고 떠들며 곱배기 파스타 한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밖에서 유독 삶의 무게를 느낀 날, 언니의 고마운 저녁 식사 초대는 대개 이런 풍경이다. 혼자 사는 싱글 여성으로서 마주하는 사소한 편견이나 일상적인 고충, 회사의 차별적 규정에 항의하는 글을 사내 게시판에 올리며 손 떨렸던 얘기, 우리를 분노케 하는 사회면 뉴스들에 입을 모아 성토하고 싶은 마음들, 이 모든 게 그 날의 식탁 위에 올라오고 사라진다. 언니는 함께 살던 대학 시절, 내가 학내 여성주의 운동을 하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사서 받을 때 동생이 좀 유난스러워 보이기도 했단다. 그러나 둘 다 일하는 여성으로서 30대의 한 가운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언니는 나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누구보다 생생한 영감을 주는 어른이다. 자매는 어느새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가는 동료 시민이 되었다. 때로 인생의 파고(波高)가 높아져 그걸 뛰어넘을 힘이 달릴 때면 나는 언니의 ‘면 많이’ 파스타 맛을 떠올릴 것이다.
언니는 언제나 부엌에 아이패드를 놓고 넷플릭스를 틀어둔 채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요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