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페미니즘 투쟁기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좀 이상한 애들이잖아.”
회사 점심 시간 부서 사람들끼리 밥을 먹다 한 선배가 말했다. 전날 예능 프로에 나왔던 유아인이 일전에 온라인에서 누구와 왜 키보드 전쟁을 벌였는지에 관한 화제 끝에 나온 얘기였다. 쿨럭, 하고 먹던 마라샹궈가 잠시 목구멍에 걸렸지만 나는 이내 꿀꺽 삼키고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아무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으니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넘어갔다. 내가 거기서 말을 이어 받았다면 선배랑 싸우자는 투로 들렸을 게 뻔했다. 평소에도 잘 먹던 매운 음식이지만 그 날 따라 오후 내내 속이 쓰렸다.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가 요즘만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적이 없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2018년 시작된 #Metoo 운동, 작년의 <82년생 김지영>, 올 초의 n번방 사건을 둘러싼 사법 대응과 후속 일화들이 끊이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백래쉬(사회적 변화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 심리 및 행동)’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만큼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갖는 함의가 그 어느 때보다 각종 편견에 둘러싸여 있다. 선배의 무심한 말도 다 시절이 만든 프레임이다. 나는 어째서 유독 이런 의제들에 소화가 안 될 만큼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그리고 그 때마다 가장 짙게 몰려오는 감정은 바로 내가 실패했다는 절망감이다.
십여 년 전 지방 도시에서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된 스무 살의 나는, 같은 과 남자 동기들에게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여자 동기들을 진정으로 동등한 교우로 느끼는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여성혐오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몇몇은, 일베가 생겨나던 때의 초기 유저였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도 어느 날 ‘보O아치’라는 말을 들어봤냐며 남자를 뜯어먹는 여자들에 대한 온라인 밈(meme)을 내게 들려줬고, 신문에서는 ‘된장녀’라는 신조어가 다른 사회 현상들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학교 앞 원룸에서 자취하는 여자 친구들은 늘 밤길을 조심해야 했고 실제로 누군가로부터 성인 용품이 든 위협적인 택배를 받기도 했다. 과방에서는 종종 여자애들의 얼굴이나 몸매가 점수로 매겨졌다. 나는 기원을 알 수 없어 불편한 이 여성혐오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그 때부터 페미니즘 서적들을 골라 읽기 시작했고, 캐나다 교환대학에서 여성학 강의를 찾아다녔다.
교환학생에서 돌아와 4학년이 된 나는 단과대학 학생회장에 출마했다. 그리고 페미니즘적 가치를 기조로 내세우는 학생회를 선언했다. 약자를 배제하는 학내 문화와 제도를 개선하고 성평등과 소수자 인권이 보장된 학생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 몇몇과 선거본부를 꾸려 당선됐지만, 학과의 특성 상 다들 일찌감치 고시나 로스쿨 준비를 시작하는 탓에 단과대에 활기를 불러 일으키기는 쉽지 않았다. 대신 나는 대외적으로 우리 학생회가 말하고자 하는 가치관과 메시지를 전파하는 활동에 좀 더 집중했다. 사후피임약 처방 필수 법안을 규탄하는 단과대학 연서 자보를 쓰고, 성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늦은 귀가 탓으로 돌리는 시선에 반발하며 전세계적으로 촉발된 ‘슬럿워크(Slutwalk)’의 행진 참가자를 모았다. 응원가를 성차별적인 가사로 개사해 부른 상대 학교 응원단을 비판하고, 페미니즘을 둘러싼 다양한 주제로 함께 이야기하는 교내 세미나를 기획하며 인터뷰지를 발간했다.
1년 간의 이 페미니즘 학생회 임기는 내게 의미 있는 많은 것을 남겼지만 스트레스와 자괴감도 함께 남았다. 특히 우리가 그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구조적 문제와 사회적 맥락을 짚으려고 시작한 활동이, 종종 남자인 구성원 개개인을 탓하거나 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만 여겨질 때 벽에 부닥쳤다. 동료 시민으로서 함께 싸워 달라는 말, 성평등한 사회가 너와 나 모두를 자유롭게 만들 것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은 이들 앞에서 무력했다. 나름대로의 큰 뜻을 품고 시작했지만 공동체가 불편해하는 화두를 던질 수밖에 없음에 스스로 계속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 매번 어딘가를 향해 불만을 제기하고, 열변을 토하고, 싸우다가 지치고, 실망해 괴로워하던 내 모습만 떠오른다. 차라리 좀 더 뻔뻔할걸, 누가 뭐라고 하든 내 소신에 확신을 더할걸, 하는 후회도 남는다. 임기를 돌아보며 성공적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순간들은 불행히도 없는 것만 같다.
졸업 후 시간이 흐르고 직장 생활을 한지도 여러 해가 지났지만, 이 기억은 여전히 들춰내기 쉽지 않은 실패에 대한 기억이다. 특히 요즘처럼 젠더 이슈가 수면 위로 보란 듯이 떠올라 갖가지 층위의 담론들이 오고 가는 것을 지켜볼 때면 더더욱 복잡한 심경이 되고야 만다. 내가 이 문제로 고군분투했던 세월이 지나고도 세상은 제자리인 것 같아 좌절감이 밀려오는 것이다.
“아직도 이 모양이라 절망스럽고, 앞으로도 이럴까 봐 두려워요.”
#Metoo에 나섰던 이에게 가해지는 무분별한 온라인 2차 가해에 분노하며 사내 심리 상담 센터를 찾아갔을 때, 이 사건에 관한 주요한 감정을 묻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실패한 페미니즘. 그러나 나는 앞으로 이것을 계속 실패의 기억으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최근의 경향들은 한편으로 명백한 성공의 방증이다. 몇 해 전을 떠올리면 세상은 느리게나마 조금씩 변하고 있고, 오늘날을 만든 건 결국 그 시절의 나, 그리고 우리가 모여서다. 약자를 대상으로 한 권력형 성폭력,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법 촬영과 디지털 성범죄, 데이트 폭력, 또 성차별적인 콘텐츠와 여성혐오적 언어, 이 모든 것들에 관대하던 사회가 이제서야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 전부터 목소리 내어 말해온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치지 않고 연대하며 싸워온 결과다.
우리 사회는 지금처럼 이 문제들로 시끌벅적해야 마땅하다. 페미니즘은 이 모든 편견과 오명을 견뎌내며 다양하게 정의되고 관심 받아야 할 주제다. 이 치열하고 지난한 논의에 굴하지 않고 의견을 보태야만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다. 앞서 간 여성들에게서 용기를 얻었듯, 이제는 청소년이나 20대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으로부터 배우고 그들을 응원할 것이다. 그리하여 목에 걸린 음식처럼 내 소화를 막았던 두려움을 꿀꺽 삼킬 것이다.
“선배,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이상한 애들이 아니라 성공할 페미니스트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