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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May 12. 2020

컨실러

2020년 3월의 어느 날, 팬데믹의 시대에 미국에 있는 H에게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하는데 문득 네 생각이 났어. 아, 요즘은 마스크 때문에 외출 준비 시간이 좀 줄었어. 화장 공들여 해봤자 어차피 마스크에 다 묻고 지워지니까 평소보다 훨씬 간단히 하거든. 원래 파운데이션이나 쿠션을 얼굴 전체에 팡팡 두들겨 펴발랐다면, 요즘은 썬크림만 얇게 바르는 걸로 피부 메이크업을 갈음해. 아, 대신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 밑 다크써클이나 너무 진한 잡티들은 컨실러로 가리는 거야. 맞아, 컨실러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몰라. 요즘 뷰티 유튜버들도 저마다 ‘마스크에 안 묻어나는 화장법’, ‘마스크 메이크업 꿀팁’ 따위의 제목으로 방송 찍어 올리던데, 보니까 걔네도 다들 이렇게 하더라? 사실 제일 간단한 건 그냥 여자들 다 같이 화장을 안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 게지.


잘 지내니? 거기 사람들 마트 엄청 털어가더라. 넌 당장 급한 생필품은 잘 구해서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번 네 인스타 보니까 학교 도서관에 사람 아무도 없어서 혼자 한 층 전세 낸 것 같던데. 여기가 좀 진정세에 접어드니까 바다 건너가 정말 많이 심각하구나. 너랑 와이프 둘 다 아프지 말고 무사히 개강날까지 잘 버텼으면 좋겠다. 아시안 음식점이나 슈퍼마켓은 비교적 한가할 테니 이 때를 틈타 한국 음식이라도 먹으러 가서 기분 전환하는 게 좋으려나.


실은 왜 아침부터 네 생각이 났냐면 말야. 요 며칠 사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특히 너를 떠올리게 해. 작은 도시의 우리 학교에서 문과 전교 1등이던 네가, S대 경영대에 입학하고 나서 나한테 들려줬던 얘기들을 기억해. 너네 과엔 집도 잘 살고 공부도 잘해서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 들어왔지만 실은 머릿속이 쓰레기로 가득 찬 남자애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여자애들이 자리에 없으면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서슴지 않고,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 널 무시한다고. 그 때 난 나랑 같은 과 남자애들도 별반 다를 게 없어서 놀라진 않았지만, 마음 한 켠에서 네가 걱정되긴 했어. 넌 그런 집단에 결코 스스로를 맞추지 못할 애인걸 알았기 때문이야. 졸업하자마자 초일류 대기업에 덜컥 취직을 한 너는, 아니나 다를까 공무원 성 접대에 끌려 다녀야 했던 신입사원 시절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때려치웠어. 그러고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 조용히 혼자 공부를 하며 석사를 마쳤지.


그러다 2년 전쯤 기억 나니? 너 박사 유학 떠나기 직전 초여름에 우리 다같이 가평으로 1박 여행 갔었잖아. 밤에 펜션에서 삼겹살 구워 먹다가 P가 새 여자친구 얘길 꺼냈어. 여자친구 앞에서 당시 유튜버 양예원 사건에 대해 양예원의 진술을 의심하는 남초 커뮤니티의 여론을 읊자 여자친구가 “오빠도 똑같다, 역겹다.”라고 했다는 거야. 그 말에 너무 충격 받았다던 P를 넌 이렇게 거들었어. “얘 여자친구 페미가 아니라 페~~~에미다.” 그 때 나는 마시던 소맥잔을 내려놨어. 넌 뒤이어 말했지. S대 학내의 ‘한남’ 혐오가 심각해서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가 들끓고 있다고. 나는 심장이 쿵쾅거렸어. 페미와 페~~~에미의 차이는 뭔지, ‘한남 혐오’ 이전에 무슨 혐오가 있었는지, 그리고 대체 왜들 그렇게 지겹도록 가해자한테 감정이입을 하는지, 너한테 조목조목 따져 묻고 싶었어. 하지만 무기력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지. 남자들이 성폭력 사건에서 중립, 팩트 체크 운운할 때 여자들이 감정적이어 보일 수밖에 없는 건 그 동안 당한 게 많아서 그렇다고. 이렇게 무딘 항변마저도 매우 감정적으로 그리고 바보처럼 얼버무리며 끝낸 내게, 넌 말했어. “그래 맞아. 여자들은 그런 일들을 많이 겪고 사니까 당연히 객관적이기가 어렵지. 그건 이해하겠다.”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난 입을 다물었어. 그 땐 내가 좋아하는 친구랑 언쟁할 용기가 없었나봐. 어쩌면 싸워야 할 상대가 도처에 너무 널려있어서 너까지 적으로 만들 힘은 남아있지 않았는지도 몰라. 그 동안 우리 얘길 조용히 듣고 있던 B가 대화를 끝냈어. “난 솔직히 내가 남자라 그런지 이런 문제 잘 몰라서 할 말은 없는데, 요즘 너무 과열돼있는 것 같긴 하다.”


그렇게 우리는 n번방을 키워냈어. 여자인 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적 농담에 끼지 않으면 교우관계가 망가지는 분위기가, 성 접대가 싫으면 사회생활은 포기해야 하는 직장 문화가, 성범죄에 있어선 기가 막히게 가해자 동정 여론이 생겨나는 패턴이, 이런게 문제라고 목소리 내는 이에겐 페~~~에미로 낙인 찍는 손가락이, 마지막으로 나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서로 미워하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자던 한가로움이, 오늘의 n번방을 만든 거야. 검버섯처럼 사회 전체에 퍼져 있던 26만의 n번방 가입자들을 가려준 컨실러였던 거야. 슬픈 건 뭔지 아니? 컨실러로 상처나 트러블을 가리면 하루 정도는 얼굴이 아주 깨끗해 보이잖아. 근데 지우고 나면, 숨겼던 국소 부위는 그동안 숨을 쉬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악화돼 도져있어. 그러니 이제야 드러난 민낯은 예견돼 있었던 거야. 친구야, 나는 내가 n번방의 존재에 놀라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슬퍼.


내일이면 또 마스크를 끼고 출근을 해야 해. 이 모든 사태가 잠잠해지면 사람들의 마스크 밑 얼굴은 어떤 표정일까? 팬데믹은 지겨워도 n번방 얘기를 지겹게 느끼진 않았으면 좋겠어. 이미 너무 늦었지만 그것만이 진짜로 깨끗한 얼굴의 미래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그 때까지 건강하고, 우리 함께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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