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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May 28. 2020

미래의 아들에게

앞으로 내게 '아들’이라는 존재가 생길 아주 희박한 가능성을 가정하며

아들아.


살면서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아끼지 말아라.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은 아무리 여러 번 힘주어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상대가 ‘도대체 왜 그렇게 고마워 하시고’, ‘왜 그렇게 미안해 하세요’라고 느낄 만큼 이 말을 몇 번이고 충분하게 전달해라. 이 말들이야말로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는 그런 말들이다.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기실 고맙다는 말보다 좀 더 무거운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살면서 남한테 도움 받을 일, 진심으로 감사를 표할 일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한 잘못은 너의 의도와 달리 벌어진 일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상했던 것이라 할지라도 그와 별개로 사과할 마음의 준비는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미리 채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너는 분명 다른 이들보다 많이 가지고 누리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를 빼앗긴 이들, 누려보지 못한 이들, 피해 의식이 체화(體化)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차하면 사과해야 하는 순간에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거나, 억울해하거나, 혹시 네가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 적기를 날려버릴 수 있다. 네가 잘못한 일이 분명하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반드시 제대로 사과하거라. 이 말을 꼭 명심해라.


너는 되물을 것이다. 어머니, 잘 한 사과란 대체 어떤 것인가요. 너에게 세 가지를 남긴다.


네가 잘못한 일에 대해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수사로 짚어라. 사과를 받아 마땅한 이는 네가 스스로 저지른 잘못에 대해 어떻게 자각하고 있는지가 그 무엇보다 궁금할 것이다. 사과하라니까 사과하는 것인지, 명백하게 과오를 깨닫고 인식한 채로 사과하는 것인지가 이 말을 들을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사과를 하는 이와 사과를 받는 이가 생각하는 사과의 지점이 다르다면, 그 사과는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그 때의 네가 공인이거나 많은 이들에게 노출된 인물이라면 다음 단어를 주의해라. ‘심려를 끼쳐서’, ‘염려를 끼쳐드려서’, ‘걱정을 끼쳐드린 모든 분들께’. 이 단어들은 모두 사전적으로 ‘걱정’을 뜻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기억하거라. 너의 사과를 듣거나 너의 사과문을 읽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너를 걱정하지 않는다. 너를 비난하고 책망할 뿐이다. ‘걱정’의 대상이 되는 이는 피해자다. 그러니 ‘심려를 끼쳐드렸다’는 말을 할 이는 오히려 피해자다. 네가 쓸 언어가 아님을 명심해라. 이 단어들은 이렇듯 틀렸을 뿐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뭉뚱그리기 때문에 유해하다. 적확하게 사안의 본질을 표현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하지 말아라. ‘저 때문에 상처를 받으셨다면’, ‘제 말과 행동이 그렇게 전달되었다면’, 등의 가정문은 사과에서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말들이다. 응당 너의 사과를 들어야 할 사람이라면 이미 너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너의 말과 행동은 그렇게 전달된 것이 맞다. 모든 형태의 사과에서 가정은 불필요할뿐더러 비겁하다. 입으로는 사과를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내가 사과를 하지 않았어도 될’ 상황에 대한 가설을 열심히 펼치고 있는 것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혹여 너의 사과에서 드러나지 않는지를 늘 돌아보아라. 피해를 입은 이는 절대 네게서 촉발된 그 피해를 입기 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고, 피할 생각을 말아라. 너의 잘못을 네 안에서 정면으로 마주해라. 사과를 해야만 하는 상황은 온전히 네가 자초한 것이므로 부디 어떠한 가정도 전제도 조건도 없이 사과해라.


이 사과를 하면서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함께 선언하거라. 기본적으로 이 내용의 적시는 사과를 받는 이에게 네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신뢰와, 미약하게나마 보상과 위안을 줄 것이다. 특히 이것의 중요한 기능은 너 스스로를 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데에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너는 누리면서 살 것이다. 그렇기에 조금 다치고, 깎이고, 닳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잘못을 통해 어떤 인간으로 거듭나는지가 나는 너의 엄마로서, 동시대를 일정 기간 함께 살아갈 한 인류로서 중요하다. 인간 역시 기계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진정으로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제대로 된 사과다. 애초에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살면서 우선이겠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그 동안 이미 너에게 충분히 가르쳤다. 어떠한 장애도 타고 나지 않았고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아마도 중산층 이상의 이성애자 남성으로 살아갈 아들아, 이것이 필요한 순간의 너를 위해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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