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서를 May 12. 2020

운동을 하는 이유

2019년 11월 어느 날의 일기

미국 드라마를 한창 열심히 보던 대학 시절, 뇌리에 강렬하게 꽃혔던 장면이 있다. 그것은 너무나 뜬금 없게도 <크리미널 마인즈> 시리즈에서 고정 주연들 중 한 명인 ‘데릭 모건’의 여자친구가 요가를 하는 장면이다. 당시 내 눈에 지상 최대의 핫가이였던 모건의 애인은 똑똑하고 아름다운 유색 인종의 의사로, 퇴근 시간이 되면 흰 가운을 벗고 요가 매트를 챙겨 예의 그 힙업된 몸매를 뽐내며 유유히 떠나는 모습을 연출했다. 운동하는 여성이 이와 유사한 이미지로 활용되는 건 미드 여기 저기서 아주 흔한 일이었는데, 아직도 현실 속 나의 누추한 요가 시간에 떠오르는 건 왜 유독 이 대목인지 모를 일이다. (심지어 이 에피소드에서 그녀는 범죄 프로파일러인 남자친구의 사건에 연루되어 운동 가는 길에 실종되고 마는데…) 어쨌거나 20대 동안 내 게으른 몸뚱아리를 일으켜온 건 일도 사랑도 운동마저도(!) 잘 하는 이런 여성에 대한 판타지였다.


일찍이 <미생>의 장그래는 전쟁 같은 세상에서 체력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2017년 <IZE> ‘우먼스플레인’ 기획 속의 ‘운동하며 나이들기‘ 칼럼에 따르면 ‘최고의 노후 대비는 돈보다 근육을 모으는 것‘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생존을 위해 운동한다고들 한다.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공감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20대의 내가 이상적인 여성 상을 설정해놓고 그걸 발톱만큼이라도 따라가기 위해 운동을 했다면 지금 운동을 하는 이유는 조금 달라졌다. 비교군은 사라졌고 나를 위한 일념만이 남았다. 운동을 계속 하는 이유는 살면서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는 인간이고 싶어서다. 여기서의 ‘업그레이드’란 하드웨어적인 것보다는 소프트웨어 차원의 그것이다. OS를 업데이트하려면 배터리는 풀로 충전된 상태여야 하기 마련이다. 정신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혹은 살면서 에너지가 소모되는 큰 일을 치르기 위해 나는 육체를 기른다.


올 봄, 살면서 처음으로 사내 심리 상담 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늘 건강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믿어왔던 오만이 무너진 건, 내 속에 화가 너무 많이 쌓여 있음을 깨닫고서다. 정점은 황당하게도 4월에 벌어진 진주 방화 살인 사건이었다. 불특정다수의 아파트 주민 중에서도 여성들과 70대 노인만이 희생된 사건이었는데, ‘묻지마 범죄‘, ‘무차별 살인’라는 단어를 쓰는 언론과 경찰의 둔감함이 견디기 어려웠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광기의 칼끝도 어김없이 약자를 향하는 명백한 매커니즘을 똑바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스러웠다. 전문가를 찾아가 이 화를 설명하기 전까지 스스로 더더욱 괴로웠던 것은, 왜 이렇게 나이가 들면서 정서적으로 더 취약해졌는가 하는 점이었다. 노화란 내면이 점점 단단해지고 강해진다 해도 억울한 일인데 도리어 항마력이 퇴화하다니. 사춘기에도 얌전히 넘어갔던 일련의 질풍노도를 최근에서야 겪고 난 뒤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스스로가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이슈들에 특히 분노하는지를 명확하게 인지하게 된 반면, 20대의 나에 비하면 그 화를 일시적으로 식힐 다른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더 쉽게 상처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아픈 부위를 곧바로 집어낼 수 있으므로, 치유의 기반이 될 기초 체력을 평상 시에 만들어두기만 하면 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것이다.


얼마 전 애인이 고양이를 입양하게 되면서 덩달아 반려 동물에 대한 공부를 해나가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반려견과 반려묘를 받아들이고 키울 때 주의해야 할 사항들, 크게는 반려 동물 시장에서 합의된 윤리, 더 나아가서는 동물권에 대한 담론까지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이 적잖다.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이 세계는 너무나 넓고 이미 다층적인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고양이 영상 보면서 귀여워할 줄만 알았지 그 동안 일자무식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짧은 시간 동안 체득한 얕은 정보에 불과하지만, 애인과 둘이서 토론 비슷한 것이라도 나누려면 힘이 꽤 든다.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 녹색당에서 진행하고 있는 2020 여성출마 프로젝트를 주목하고 있다. 50대 남성 중심이었던 국회의 얼굴을, 2020년 총선부터 다양한 청년 여성들로 채워보자는 총선 출마 프로젝트다. <벌새>의 김보라 감독, 씨네21 김혜리 기자, 작가 정세랑과 이슬아, 뮤지션 이랑과 황소윤 등 여러 아이콘들이 지지 선언을 하고 있다. 당내 경선을 준비하기 위한 ‘엑셀러레이팅’ 과정에서는 3대 핵심 의제인 정치개혁, 기후 위기, 차별과 불평등을 다룬다. 이 프로젝트에 소소한 후원을 하면서도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가 특히 기후 변화 의제에 무지하다는 점이다.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 관심 있는 이슈들만큼의 애정이라도 기울이고 필요한 지식을 쌓으려면, 내게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혹시 아는가, 지금보다 체력이 좋아지면 똑똑해지고, 차차기 총선쯤에 나도 이 의제를 나의 언어로 외치며 얼굴 한 번 내밀어볼 수 있을지. 한 번 주어진 인생에서 잠재력과 가능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해놔야 하겠다.


지난 주 문득 허리가 아팠다. 처음 겪는 요통이 가져온 두려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저런 변수들로 삐걱거릴 내 앞날에 대한 것이었다. 삶은 <크리미널 마인즈>의 요가 장면과 다르다. 큰 변화 없이 조용하게 일상을 지속하는 데에도 요통이나 사회면 뉴스 같은 크고 작은 불가측 변인들이 뒤따른다. 하물며 끊임 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지금은 먼 일처럼 느껴지는 야망까지 품고 살려니, 나는 할 수 없이 운동을 한다. 나중에 언제라도 갑자기 쓰러졌을 때, 언제나 자가 발전을 꾀하기 위해 과로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 사실 술과 담배를 좋아하던 사람이라는 소릴 들을까 두려운 것이다. 그것보단 이 편이 덜 망신스럽지 않을까 싶어서.

이전 13화 미래의 아들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